[이슈프리즘] 이재명 정부, '경제 모범생' 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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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프리즘] 이재명 정부, '경제 모범생' 되려면

1997년 영국은 18년 보수정권을 끌어내린 마흔네 살 노동당 총리에게 푹 빠져 있었다. 젊은 지도자가 그릴 새 시대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단, 기업인은 예외였다. 토니 블레어 총리가 선거 전 노동당 정강에서 ‘생산·분배·교환수단의 공동 소유’ 조항을 빼는 등 ‘오른쪽 깜빡이’를 켰지만, 집권 후에는 핵심 지지 기반인 노동자 우대 정책을 내놓지 않겠느냐는 우려에서였다. 그렇게 되면 1970년대 영국을 유럽의 병자로 만든 ‘영국병’(고복지·고비용·저효율 사회)이 다시 도질 것이라는 게 이들의 걱정이었다.

블레어 총리는 달랐다. 경제를 살릴 수 있다면 보수당 정책이건, 노동당 정책이건 가리지 않았다. 그렇게 ‘복지에서 일터로’(Welfare to Work)를 모토로 무작정 주던 실업급여제도를 재취업 준비 프로그램과 엮었다. 퍼주기 복지를 막기 위해 정부부채 수준을 국내총생산(GDP)의 40% 이내로 막는 재정준칙도 마련했다. “국부의 원천은 기업에서 나온다”는 판단에 33%인 최고 법인세율을 30%로 낮췄고, 보수당이 만든 노동 유연성 체계도 그대로 유지했다.

‘토니 블러(blur·우파인지 좌파인지 흐릿하다는 의미)란 비아냥에도 흔들리지 않은 블레어리즘의 결과물은 기대 이상이었다. 그가 맡은 10년간(1997~2007년) 영국의 연평균 성장률(2.8%)은 유럽 평균(2.2%)을 웃돌았고, 10%에 달한 실업률이 절반으로 떨어졌다. 기업하기 좋은 환경이 만들어지자 글로벌 자금이 쏟아져 들어왔다. 영국의 GDP 대비 해외직접투자(FDI) 순유입은 1996년 2.3%에서 2005년 10%로 올랐다.

20~30년 전 영국 얘기를 꺼낸 것은 그제 이재명 대통령의 취임사에서 블레어 총리의 모습이 오버랩됐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대한민국에는 진보의 문제도, 보수의 문제도 없다. 박정희 정책도, 김대중 정책도 유용하면 구별 없이 쓰겠다. 이재명 정부는 실용적 시장주의 정부가 되겠다. 통제하고 관리하는 정부가 아니라 지원하고 격려하는 정부가 되겠다”는 대목에서다.

이 대통령을 만나본 기업인들은 다들 그의 유연함과 실용주의를 기억한다. 이념과 명분에 갇히기보다 더 큰 대의를 쟁취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변화를 망설이지 않는 스타일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게 바로 지금, 기업인들이 이재명 정부에 기대하는 대목이다.

지금, 우리 기업들은 사면초가 상태에 빠졌다. 중국의 공습에 반도체, 스마트폰, 자동차, 철강, 석유화학 등 주력 산업 점유율은 해가 갈수록 쪼그라들고 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한국 제조업의 유효기간은 5년뿐”이란 얘기가 당사자인 기업인 입에서 나올 정도다. 그렇다고 인공지능(AI) 휴머노이드 등 미래산업을 잘하는 것도 아니다. 돈 많고, 사람 많은 미국과 중국이 쌓아 올린 철옹성을 뚫을 방법은 쉬이 보이지 않는다.

온 나라가 합심해 우리 기업을 응원해도 모자랄 판이지만, 민주당 공약집에는 상법 개정안(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주주로 확대), 노란봉투법(하청업체 노조도 원청에 직접 단체교섭 허용), 65세 정년연장, 주 4.5 근무제 등 반기업 정책이 한가득이다.

대통령이 선거 때 약속한 공약을 수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국내외 많은 지도자가 엄청난 정치적 부담을 딛고 용기를 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랬다. 정리해고제를 도입한 사람이 노동자를 정치적 기반으로 삼은 김 전 대통령이었고, 반미를 외친 노 전 대통령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우리 기업들의 글로벌 영토를 넓혀줬다. “오로지 국익만 생각하겠다”는 이 대통령의 유연한 정책 전환을 우리 산업계는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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