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로] 넌 깍두기라 괜찮아

3 weeks ago 9

공존과 배려의 아이콘 '깍두기'

(서울=연합뉴스) 이승우 선임기자 = 세계적 인기를 누린 K-드라마 '오징어게임'에는 현재 중장년층 이상 한국인들이 어릴 적 즐겼던 놀이가 다수 등장한다. 이는 우리 문화와 풍습을 세계인에 알리는 역할을 넘어 우리 기성세대와 신세대를 엮어주는 가교로도 작용했다. 온라인 게임, 혼자 놀기, 실내 놀이에 익숙한 젊고 어린 세대가 부모와 조부모의 놀이 문화를 접하고 이해하는 긍정적 소통의 기회였다.

이미지 확대 딱지치기 하는 아이들

딱지치기 하는 아이들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배포 DB 금지]

가난했던 나라에서 유년기 놀이는 돈이 안 들거나 소액의 비용만 드는 것이어야 했다. 그래서 당시 아이들은 별 장비 없이 맨몸으로 부딪치는 놀이를 줄기차게 창조해냈다. 그저 함께 뛰고 웃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했다. 오징어놀이, 구슬치기, 딱지치기, 공기놀이, 술래잡기, 비석치기, 제기차기, 고무줄놀이, 줄넘기, 다방구,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말뚝박기 등 당장 떠오르는 놀이만 열거해도 행복했던 추억이 생생히 소환된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 보면 어느새 저녁 어스름이 내렸고, 엄마들은 아들딸을 찾아와 이름을 부르며 "밥 먹어라" 외쳤다.

당시 아이들에겐 놀이를 위한 준비물이나 참가비가 대개 필요 없었다. 시간과 장소 약속도 해본 적 없다. 학교에 다녀오면 책가방을 마루에 냅다 던져놓고 부리나케 동네 공터로 달려갔던 기억이 난다.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빈터에는 언제나 아이들이 많든 적든 놀고 있었고, 그 무리에 합류하면 그만이었다. 참가 자격도, 차별과 따돌림도 없었다. 그저 공터를 찾아가기만 하면 또래들과 어울려 떠들고 놀 수 있던 아름답던 시절이다. 생각해 보면 그때가 천국의 현실판 아니었을까.

이미지 확대 드라마 '오징어게임' 포스터

드라마 '오징어게임' 포스터

[넷플릭스 제공. 재배포 DB 금지]

남과의 비교와 무한 경쟁에 갈수록 시들어가는 요즘 아이들을 보면 과거 놀이 문화가 더 그립다. 특히 '깍두기'는 누구든 차별 없이 놀이에 낄 수 있던 '다 함께 문화'의 정점이었다. 갑자기 깍두기라 하니 실제 '깍둑썬 무김치'는 아닌 것 같고, 요즘 속어로 '조폭 형님'을 일컫는 거냐 묻는 이도 있을 법하다. 하지만 당시 깍두기는 놀이에서 배제되지 않게 배려한 '약자'를 칭하는 단어였다. 편을 나눠 승패를 가르는 놀이에서 참여자 평균보다 현저히 체구가 작거나 나이가 어리면 당연히 '1인분' 몫을 못 한다. 이 아이를 데려가는 쪽은 전력상 불리하다. 그렇다고 함께 놀고 싶은 아이를 매정히 집에 가라 할 순 없으니 깍두기란 이름으로 참가 자격을 줘 함께 어울렸다.

깍두기는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활용됐다. 놀이를 위해 모인 아이들이 홀수일 경우 편을 가를 수 없으니 가장 약한 아이를 깍두기로 먼저 지정한 뒤에 편을 가르고, 객관적 전력이 더 약해 보이는 쪽에 깍두기를 포함해 균형을 맞추기도 했다. 깍두기가 놀이엔 참여하되, 특정 편에 포함하지 않고 그의 성적이 결과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게 하는 방법도 있었다. 힘을 쓰는 놀이를 하던 중 깍두기를 마주치면 다치지 않게 살짝 봐줬다. 깍두기 입장에선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지만, 모두 다 함께 놀이한다는 대승적 원칙에 더 공감대가 컸다. 깍두기를 끼워준 무리와 깍두기가 된 사람이 양보와 신뢰를 나눴다. 적어도 그때는 약자를 따돌리지 않고 배려하려는 마음이 있었다는 증거가 바로 깍두기다.

이미지 확대 장욱진 회화 '공기놀이'

장욱진 회화 '공기놀이'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이런 깍두기 풍습은 속칭 '왕따'로 불리는 집단 따돌림 문화가 일상화한 듯한 요즘 더 그리워진다. 지금 우리 아이들의 마음속에서 깍두기가 사라진 대신, 약자를 배제하고 소수 희생양을 공격하려는 마음이 커지고 있다면, 이는 기성세대 책임이다. 어린 시절 깍두기를 살폈던 동심을 까맣게 잊은 채 이기는 것, 강한 것, 예쁜 것, 좋은 것, 비싼 것에만 집착하는 모습을 우리 아이들에게 보여준 게 아닌지 자성해야 할 것 같다. 한배를 탔다면 조금 약하거나 모자라는 사람도 손잡고 함께 가야 모두 행복해진다는 깍두기 문화가 한국인의 의식구조 안에 다시 움트길 바란다. 다수는 약자나 의견이 다른 소수에 배려를 선물하고, 반대로 받는 쪽은 아무리 작은 배려라도 받는 걸 당연히 여기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 게 공존을 지속할 길이다.

이미지 확대 뛰어노는 아이들

뛰어노는 아이들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배포 DB 금지]

leslie@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5년09월27일 07시55분 송고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