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의 노트 봤어? 교수님이 챗GPT로 만들었어.”
뉴욕타임스의 한 기사에 따르면, 현재 여러 미국 대학 재학생들 사이에서는 'Rate My Professors' 같은 사이트를 통해 챗GPT 특유의 표현(예: crucial, delve)이 포함된 강의 자료를 감별하며, 교수들의 인공지능(AI) 의존 현상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고 한다. 한 학생은 조직행동 수업 강의 노트를 검토하던 중 “리더십 관련 모든 항목을 확장해요. 더 자세하게.”라는 챗GPT 지시문을 발견했고, 이는 비싼 등록금과 학교의 명성을 고려할 때 최고 수준의 교육에 대한 기대를 저버린 계기로 작용했다. 그녀는 공식적인 민원 제기를 했고, 8000달러에 이르는 등록금 환불까지 요청했다.
타이튼 파트너스(Tyton Partners)의 2024년 보고서에 따르면, 교수진의 36%가 정기적으로 AI를 사용하고 있으며, 이들 중 91%는 매달 한 번 이상 AI를 활용하고 있다 한다. 이처럼 교수들이 수업 자료와 피드백 작성을 위해 AI를 적극 활용하는 가운데, 학생들은 그 사용 여부 자체보다 사용 방식과 관계 형성의 변화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특히 AI가 생성한 자료가 수업에 활용되었는지 여부를 추적하거나, 교수의 피드백이 인간적인 감응 없이 생성된 것인지에 대한 의심이 커지면서, 교수와 학생 간 신뢰 구조에 균열이 생기고 있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AI 도구는 교수진이 시험을 만들고 수업 계획을 짜며, 문헌 검토나 인용 정리를 보다 수월하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 겸임 교수들이 생계를 위해 여러 일을 병행하는 현실을 고려할 때, AI 활용으로 절약된 시간은 연구와 교육에 더 집중할 기회를 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생산성의 이면에는, 교육이라는 고유한 책임과 성장의 인간적 관계에서 학생들을 배제해 온 결정들이 존재하며, 이는 공정성과 교육의 본질에 대해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
'무엇이 교수의 진짜 노동인가?' '무엇이 학생이 대가를 지불하고 기대하는 가치인가?'
미국의 인류학자 마셜 셀린스는 저서 'Stone Age Economics'에서, 비서구 원시사회의 경제는 자원 배분이 아니라 관계 형성의 장치였다고 주장했다. 즉, 경제적 거래란 단순히 물건을 주고받는 일이 아니라 '이 관계를 유지하자'는 신호이자 약속이라는 것이다. 그는 상인-고객, 경쟁자 간 관계에서 나타나는 부정적 호혜성(negative reciprocity)을 예로 들며, 가능한 한 많이 얻고 적게 주려는 계산적 관계의 한계를 지적한다. 반대로 가족이나 친밀한 관계에서 나타나는 일반적 호혜성(generalized reciprocity)은, 상대가 언제 어떻게 보답할지 모른 채 '먼저 주는 행위'를 반복하는 관계이며, 바로 그 속에서 신뢰가 형성된다고 설명한다.
학생이 교수진이 AI로 만든 강의 자료를 보며 느낀 것은, 어쩌면 더 이상 자신과 관계를 맺을 사람이 아니라는 신호였는지도 모른다. AI는 교수와 학생 모두에게 낯설지만 유용한 도구이다. 따라서, AI가 끼어든 교육 현장에서 어떤 관계를 설계하고 기대할 수 있을지에 대해 새로운 답이 필요하다. 그 새로운 답은, AI를 숨기고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공유하며 사용하는 방법을 함께 설계하는 것이다. 각 대학은 AI 사용 윤리와 교수-학생 간 투명한 소통을 위한 지침을 마련하고, 수업 구조 안에 AI 활용 여부를 명시하거나 토론할 수 있는 틀을 포함시킬 수 있다. 교수의 AI 사용 내역 공개, 과제나 피드백에서 AI의 역할 표기 등을 통해 기술은 '숨기고 싶은 양심의 영역'이 아닌, 함께 다루는 공적 도구로 자리 잡을 수 있다.
관련해 링크드인의 한 사용자는 자신의 과거 경험을 통해 그 단서를 제공한다. 캔자스대의 심리학 교수 데이비드 홈즈는 개인용 컴퓨터가 막 대중화되기 시작하던 1986년, 더 이상 타자기로 쓴 리포트는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학생들을 모두 컴퓨터 실습실로 데려가 워드스타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법을 직접 가르쳤다고 한다. 그는 해당 교수의 결정이 이후 몇 년간 지속되었을 기술 회피의 시기를 단축해 주었다고 회고하며, 무한한 감사를 느낀다고 적었다.
신뢰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어쩌면 교육이란 지식을 주는 일이 아니라, 실수해도 괜찮은 존재가 되어주는 일에 가깝다. 그 교수는 낯선 기술을 수용하면서도, 학생을 기술 밖에 두지 않았다. 오히려 학생과 나란히 서서 기술을 함께 경험하는 과정을 만들어주었다.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인간은 대상(It)이 아닌 '너(Thou)'로서 타인을 만날 때 진정한 관계가 형성된다고 말했다. 기술은 장치가 될 수 있지만, 관계를 감당하는 주체는 결국 인간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손병채 ROC(Reason of creativity) 대표 ryan@reasonofcreativit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