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가자의 비극, 방관할수록 더 참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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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최재석 선임기자 = 박찬욱 감독의 작품 '어쩔수가없다'의 수상이 불발된 제82회 베네치아영화제에서는 심사위원대상(2등상)을 받은 튀니지 감독 카우더 벤 하니아의 '힌드 라잡의 목소리'(The Voice of Hind Rajab)라는 영화가 또다른 화제를 모았다. 피란길에서 애타게 구조를 기다리다 이스라엘군에 살해당한 여섯살 가자지구 소녀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상영 후 23분간 기립박수를 받았을 정도로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고 한다. 영화에 담긴 소녀의 '구해달라'는 목소리에 모든 관객이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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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드 라잡의 사진

[로이터=연합뉴스. 재판매 및 DB 금지]

영화는 2024년 1월 29일 가자지구에서 일어난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당시 사건은 국내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WP)와 영국 BBC방송 등이 보도한 내용을 종합해 그날의 상황을 재구성하면 이렇다.

# 1월29일 오전 바샤르 하마다(44)는 아내 아남(43)과 장녀 라얀(15)를 비롯한 자녀 5명, 조카 힌드 라잡(6)을 한국 기아차의 피칸토(모닝의 현지명)에 태우고 피란길에 올랐다. 전날 밤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 북부 가자시티로 다시 진입했고, 소셜미디어 '엑스'(옛 트위터)를 통해 주민 대피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에서 출발한 차량은 북쪽으로 불과 400m도 못 가 멈춰 섰다.

같은날 오후 1시께 가자지구 최남단 라파로 이미 피란해 있던 사미르 하마다의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피칸토 차량에 타고 있던 사미르의 조카 라얀이 건 전화였다. 라얀은 떨리는 목소리로 이스라엘군이 차에 총격을 가해 자신과 사촌동생 힌드를 제외하고 다른 가족은 모두 숨졌다고 말했다. 랴안은 자신도 다쳤다고 했다. 통화를 마친 사미르는 고심 끝에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살고 있는 사촌 무함마드 살렘 하마다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전화를 걸었다.

오후 2시28분께 요르단강 서안지구 라말라에 있는 팔레스타인 적신월사(PRCS·이슬람권의 적십자사) 응급구조대로 전화가 걸려 왔다. 사미르의 연락을 받은 무함마드가 독일에서 건 전화였다. 그는 사미르에게 들은 상황을 설명하고 랴얀의 휴대전화 번호를 구조대에 알려줬다. 가자시티에서 온 구조 요청이 라파와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라말라까지 전달된 것이다.

구조대는 곧장 라얀에게 전화를 걸었다. 라얀은 전화에 대고 겁에 질린 다급한 목소리로 "이스라엘군이 총을 쏘고 있다. 탱크가 바로 앞에 있다"고 소리쳤다. 구조대가 추가 질문을 하려는 순간 갑자기 총성이 울렸고 라얀의 비명과 함께 통화는 끊겼다.

구조대가 다시 전화했을 때 전화를 받은 건 힌드였다. 힌드는 점점 멀어져 가는 목소리로 "제발 와서 저를 구해주세요"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전화기 너머 멀리 총성들이 들렸고 통화는 더는 이뤄지지 않았다.

위치 추적을 통해 힌드 일행이 탄 차량 위치를 확인한 구조대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보건부를 통해 이스라엘군의 허가를 받아 현장으로 구급차를 급파했다. 구급차에선 곧 현장에 근접한다는 무전이 왔다. 구조대 본부에선 "천천히 접근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런데 갑자기 총성이 울렸고, 구급차와 교신이 끊어졌다.

그로부터 12일이 지난 뒤에야 당시 구조대원 2명은 힌드에게 끝내 가지 못한 채 이스라엘군 공격으로 숨진 것으로 밝혀졌다. 구조대를 기다리던 힌드도 총알로 뒤덮인 차 안에서 차가운 시신으로 발견됐다. 힌드와 구조대원 시신이 발견된 위치는 불과 50m 떨어져 있었다.

힌드의 당시 통화 목소리는 영화에 고스란히 담겼다. 벤 하니아 감독은 적신월사와 힌드의 가족들에게 연락해 힌드의 목소리가 담긴 통화 원본 녹음을 입수했다고 한다. 벤 하니아 감독은 수상 소감에서 "영화는 힌드를 되살릴 수도, 그녀가 겪은 잔혹 행위를 지울 수도 없지만 그녀의 목소리를 보존하고 국경을 넘어 울려 퍼지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그녀의 목소리는 정의가 실현될 때까지 계속 울려 퍼질 것"이라며 '가자의 비극'에 관심을 촉구했다.

2023년 10월 7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 공격으로 발발한 가자전쟁의 비극은 계속되고 있다. 가자지구에서만 지금까지 어린이 1만8천여명을 포함해 6만4천명 이상이 사망했다. 이스라엘의 봉쇄 정책으로 국제사회의 지원이 사실상 끊기면서 기근 문제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유엔은 50만명 이상이 굶주리고 있다고 밝혔고, 가자 보건부는 영양실조로 인한 사망자가 387명이고 그중 138명이 5세 미만 어린이라고 발표했다. 국제사회는 가자지구의 인도적 위기를 '특정 집단의 구성원을 대량 학살해 절멸시키려는 행위'인 제노사이드 범죄로 규정하기도 했다.

현지 상황을 외부에 알려온 언론인의 피해도 크다. 가자지구에서 사망한 팔레스타인 기자가 최대 247명에 이른다는 통계도 있다. 지난달 말에는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 병원을 공습해 언론인 5명을 포함해 20명이 사망하는 일이 있었다. 뉴욕타임스(NYT)는 최근 보도에서 가자지구 전쟁에 대한 '세계의 증인' 역할을 해온 팔레스타인 기자들이 목숨의 위협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으며 이는 가자지구 전쟁에 대한 정보를 더욱 제한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가자전쟁이 3년째를 맞으면서 세계의 관심도 예전 같지 않은 분위기다. 국내 언론의 관련 보도도 눈에 띄게 줄었다. 그 사이 오늘도 그곳에선 수많은 사람이 전쟁의 참화 속에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고 있다. 가자지구의 인도적 위기는 단순히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를 지키는 문제다. 세계인들이 관심을 갖고 필요한 목소리를 꾸준히 내야 한다.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이 위기를 방관한다면 그것은 가자 사람들의 생존권을 말살하는 구조적 폭력과도 같다. 비극은 또 다른 비극을 낳기 마련이다. 그 비극은 언제든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다.

bondong@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5년09월08일 17시02분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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