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집한 현대사회에선 사실이 아닌데도 많은 이가 사실로 믿는 솔깃한 이야기들이 흐른다. 도시전설로 통칭된다. 일정 근거나 호소력을 갖췄지만 본질은 ‘카더라’요, 서브컬처다. 자본시장에도 그럴싸한 ‘증시전설’이 명멸한다. ‘공매도 때문에 주가가 이 모양’이라는 오해가 그런 부류다. 최근 각광받는 증시전설은 ‘대주주가 불법과 전횡으로 개미를 약탈 중’이라는 스토리다.
기업인·대주주를 빌런으로 보는 인식에 두 개의 사건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과 2020년 LG화학 배터리사업 분사다. 두 이벤트를 거치며 ‘갈취하는 대주주 대 핍박받는 소액주주’ 서사가 빈틈없이 완성됐다. 세계 최강의 경영 규제를 담은 상법 개정안이 입법된 배경이다.
그런데 엊그제 대법원이 증시전설의 원점이자 상징을 폭파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제기된 합병 비율 조작, 회계분식 등 어마어마한 혐의에 대해 전부 ‘근거 없다’고 판시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등 14명에게 씌워진 총 123개 혐의는 1·2·3심을 통틀어 단 하나도 인정되지 않았다.
허위와 악의로 버무려진 기소였기에 예정된 결과다. 검찰의 무모함과 별개로 ‘가짜 진실’ 제작에 앞장선 시민사회의 행태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참여연대와 민변이 2016년 이 회장 등을 검찰에 고발한 게 사태의 출발이다. 이후 집요한 여론전으로 진보 정치권까지 합세시켰다. 그 과정에서 데이터나 정황을 왜곡·오판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LG화학 사태도 생각해 볼 대목이 많다. 유망한 사업을 떼내는 바람에 소액주주가 피해를 봤다는 프레임이지만 근거는 취약하다. 주가는 분할 발표 직후 잠시(7거래일) 급락한 뒤 이내 급반등했다. 발표 직전 72만원이던 주가는 4개월 뒤 100만원대로 올라섰다. 본격적인 주가 하락은 분할 발표 6개월 뒤부터다. 독일 폭스바겐이 중국산 배터리를 선택한 게 트리거였다. 96만원이던 주가는 하루 만에 8% 곤두박질쳤고, 4년여에 걸쳐 반의 반토막까지 추락했다. 전기차 시장 둔화, 중국의 저가 공세에 ‘죽음의 계곡’을 지나고 있어서다.
물적분할에 뒤이은 중복 상장이 문제라는 지적은 새겨볼 대목이다. 하지만 논의와 입증이 더 필요하다. 일본 등 해외에선 중복 상장에 따른 ‘지주회사 디스카운트’가 뚜렷하지 않다.
삼성이 승점을 올렸지만 뒤늦은 승리요, 상처뿐인 영광이다. ‘제2의 삼성물산·LG화학 사태 방지’를 빌미로 한 상법 개악이라는 결정타가 터졌다. 대법원발 삼성 승리가 확정되기 불과 이틀 전의 일이다. 이사의 주주 충실의무 명문화, 의결권 제한(3% 룰) 확대 등 유례를 찾기 힘든 규제가 도입됐다. 집중투표제 의무화, 감사위원 분리 선출 등 ‘더 센 상법’도 예고됐다. 둘 다 도입하면 이 역시 세계 유일국이 된다. 자사주 의무소각도 “개악 중의 개악”(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이다. 본질이 자본 축소인 소각으로 일류가 된 기업은 거의 없다. 보잉, GM 등 ‘소각으로 주가 부양’에 매달리다가 거덜 난 사례는 많다.
여권은 상법 개정으로 코스피지수가 급등 중이라지만 아전인수 격이다. 도널드 트럼프가 ‘90일 관세 유예’를 전격 발표한 4월 9일을 기점으로 글로벌 증시는 일제히 급등세다. 2년 연속 경제가 역성장한 독일 증시까지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한국 증시의 약진이 돋보이긴 하지만 최근 3개월간 코스피(29%), 코스닥(15%) 상승률은 나스닥(26%), S&P500(17%)과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계엄을 전후한 급락에 따른 자연 반등까지 감안하면 생색은 섣부르다.
국장 주도주 ‘지금조방원’(지주·금융·조선·방위산업·원전) 중 지주·금융 정도가 상법 개정 덕을 봤다. 하지만 건강한 상승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MBK의 공격을 받은 고려아연처럼 경영권 불안이 주가를 밀어 올린 측면이 적잖다.
투자자 등치는 악덕기업이 즐비한 게 현실이다. 엄벌과 예방이 절실하다. 그래도 옥석은 분명히 가리고 누울 자리도 봐야 한다. ‘기업 다구리’가 판친 지난 10년 새 경제 비상벨이 울렸다. ‘중국은 물론이고 중동 인도에도 밀리는 지경’(최태원 회장)이다. 광장과 권력의 압박에도 사실과 법리를 지켜낸 사법부의 용기로 전화위복의 단초가 만들어졌다. 상식과 이성으로 회귀하는 거대한 첫걸음의 시작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