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정부에서 발표한 'RE100(재생에너지 100%) 산업단지(산단)' 조성 계획은 단순한 산업 정책을 넘어, 대한민국의 에너지 및 산업구조, 나아가 국토 균형 발전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국가적 대전환의 신호탄으로 해석된다. 정부의 특별 지시로 추진되는 계획은 전례없는 인센티브와 과감한 규제 철폐를 예고하며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기후 위기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한국 경제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최근 대한민국 산업계를 뒤흔드는 하나의 키워드가 있다. 바로 'RE100'이다. RE100(Renewable Energy 100)이란 기업이 사용하는 전력량의 100%를 태양광, 풍력과 같은 재생에너지로 충당하겠다는 글로벌 캠페인이다. 이는 더 이상 환경 단체의 구호가 아니다. 애플, 구글, BMW와 같은 글로벌 기업들이 부품을 공급하는 협력사에까지 RE100 동참을 강력히 요구하면서, 이제는 수출 기업의 생존을 좌우하는 '무역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 거대한 흐름은 대한민국 경제의 심장인 반도체 산업에 치명적인 '청구서'를 내밀고 있다. 2021년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우리 기업이 RE100에 동참하지 못할 경우, 반도체 수출액이 최대 31%까지 급감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전체 수출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반도체가 흔들린다면, 한국 경제의 근간이 위협받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위기의 현실은 부끄러운 성적표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2023년 기준 한국의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은 9.64%로, OECD 평균(33.49%)에 한참 못 미치는 '꼴찌' 수준이다. 삼성전자가 해외 사업장에서는 97%의 RE100 이행률을 달성했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9%에 그치는 현실은 기업의 의지가 아닌, 국내 재생에너지 공급의 절대적 부족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명백히 보여준다.
이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정부가 꺼내 든 카드가 바로 'RE100 산단'이다. 이는 단순한 공장 집적지를 넘어, 대한민국의 산업 지도를 바꿀 '게임체인저'로서의 역할을 부여받은 것으로 보인다. 핵심 임무는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비수도권에 첨단 기업을 유치해, 전력 생산지와 소비지가 달라 발생하는 고질적인 '수급 불일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즉, RE100 산단은 낡은 에너지 수급 구조와 수도권 중심의 산업 지도를 '새롭게 디자인'하기 위한 전략적 거점이다. 이곳은 녹색 에너지와 첨단 산업이 만나 시너지를 창출하고, 기존의 규제와 한계를 뛰어넘는 혁신이 시도될 국가 지정 '실증 특구'인 셈이다.
이재명 정부가 관계부처 합동 태스크포스(TF)까지 출범하며 규제 제로, 상상 초월의 정주 여건, 파격적 전기료 할인이라는 전례없는 세 가지 지침을 내린 것도 기존의 틀을 깨는 혁신의 용광로로 만들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다. 이곳은 단순히 값싼 녹색 전기를 공급하는 장소를 넘어, 미래 산업 생태계의 모든 요소를 한곳에 모아 테스트하고 완성하는 거대한 실험실이 될 것이다. 아마존웹서비스(AWS)와 같은 글로벌 빅테크 기업을 유치해 이들을 앵커로 삼고 산업·연구·주거·교육·문화가 융합된 완결형 '에너지 신도시'를 만들겠다는 원대한 비전이 그 뒤를 잇는다.
결국 RE100 산단은 눈앞의 위기를 돌파하고 미래 성장 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절박한 고육지책이자, 국가의 미래를 건 담대한 실험이다. 이는 기존의 지역 단위에서 싹트던 개념을 국가적 의제로 격상시킨 것으로 에너지 정책을 넘어 산업, 국토, 교육을 아우르는 통합적 접근으로 보인다. 과연 야심찬 청사진은 위기의 한국 경제를 구할 '게임 체인저'가 될 것인가, 아니면 수많은 현실의 장벽 앞에서 좌초될 또 하나의 장밋빛 구상에 그칠 것인가. 그 성공의 열쇠는 비전의 크기가 아닌, 현실의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하는 능력에 달려있을 것이다.
이제 청사진은 그려졌다. 그러나 지도는 손에 쥐고 첫발을 뗄 용기가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거대한 실험의 성패는 더 이상의 논쟁이 아닌, 신속하고 과감한 실행에 달려있다. 이는 특정 부처나 기업의 과제가 아닌 산업계, 학계, 지역사회가 함께 힘을 모아야 할 국가적 도전이다. RE100 산단은 격변하는 글로벌 경제의 파도에 가장 먼저 뛰어드는 '퍼스트 펭귄(First Penguin)'이 되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담대한 비전을 정책 서류에서 꺼내, 대한민국 차세대 산업의 심장이 될 살아 숨 쉬는 현실로 만들어야 할 때다.
김태형 단국대 대학원 데이터지식서비스공학과 교수·정보융합기술·창업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