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많은 사람은 안창호 선생의 호가 '도산(島山)'이라는 것은 알지만, 선생이 1902년 미국으로 가는 배 위에서 하와이 섬(島)과 산(山)을 보고 굳건한 자세로 살아가겠다는 뜻을 담아 그 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잘 알지 못할 것이다. 당시 하와이는 수많은 독립 운동가와 한국인 이민자들이 조국 독립의 염원을 키우던, 그래서 독립운동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의미 있는 땅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독립운동과 함께 한 발명의 흔적이 아직도 선명히 남아 있다.
그간 우리나라 선조들의 발명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국내에 국한됐고, 해외 거주 선조의 발명에 대한 연구는 없었다. 이에 특허청은 지난해 말에 재외한국인 발명활동과 그 역사적 의의, 현대적 계승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정책연구를 진행했다. 연구는 조선의 문호개방(1876년)부터 광복(1945년)까지 주요국(미국·영국·프랑스·독일·일본)에서 활동한 재외 한국인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그 결과 독립유공자 권도인 선생, 박영로 선생, 강영승 선생을 포함한 7인의 한국인이 미국에서 특허를 등록한 사실이 확인됐다.
우선 애국지사이신 권도인 선생(1888~1962년)이 '제1호 미국특허출원 한국인'이라는 점을 밝혀냈다. 권도인 선생은 1920년 9월 14일 '재봉틀 부속장치(sewing-machine attachment)' 특허를 출원해 1921년 9월 27일 등록받았다. 권 선생은 1905년 하와이로 이주한 이후 힘든 생활 중에도 특유의 창의력과 끈기를 바탕으로 다양한 발명품을 개발해 총 6개의 미국 특허를 등록했다. 권 선생의 대표 발명품인 대나무 커튼(Bamboo curtain)은 현지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그는 가구 사업 등을 통해 얻은 수익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기부했다.
대한인국민회 등 독립운동 조직에도 직접 참여했던 권 선생은 199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그의 아내 이희경 여사(1894~1947년) 역시 1919년 대한인부인구제회 회원을 시작으로 1928년 영남부인회와 영남부인실업동맹회 회장을 맡아 독립운동을 한 공로로 2002년 건국포장을 추서 받았다. 이들 부부는 2004년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함께 안장됐다. 특허청은 올해 광복 80주년 및 발명의 날 60주년을 기념하여 권 선생의 외손자인 폴 아리나가 씨를 초청해 대전현충원에서 추모행사를 하고 발명의 날 기념식에서는 특별공로상을 수여하며 그 뜻을 기렸다.
![[ET시론] 선조들의 발명정신, 조국 독립과 국가 발전의 원천](https://img.etnews.com/news/article/2025/05/26/news-p.v1.20250526.f3e9839308b84c5dba98e09c04258740_P1.jpg)
권 선생이 '제1호 미국특허출원 한국인'이었다면, 박영로 선생(생몰년 미상)은 '제1호 미국특허등록 한국인'으로서 권 선생보다 이틀 늦은 1920년 9월 16일 '낚싯대(Fishing-rod)' 특허를 출원해 약 4개월 빠른 1921년 5월 10일 특허를 등록받았다.
박 선생은 동 특허를 미국뿐만 아니라 캐나다에도 출원해 1922년 5월 30일 등록받았다. 박 선생에 대한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흥사단 단원으로 추천돼 안창호 선생과 교류했고, 필라델피아 한국통신부 서기로 활동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선생도 독립정신을 가진 발명가임을 유추할 수 있다.
또 다른 발명가로 애국지사 강영승 선생(1888~1987년)이 있다. 그는 1934년 2월 12일에 '식품(candy) 및 제조방법(Food product and process)'으로 특허를 출원해 1936년 5월 19일에 등록받은 후 이를 사업화했다.
한편 강 선생은 클래몬트 학생양성소 감독(1917년), 초등국어교과서 편찬위원(1921년), 시카고 지방회 대표(1938년) 등을 역임하고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는 등 다방면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주목할 점은 강 선생의 모친인 황마리아 여사, 아내 강원신 여사, 누나 강혜원 여사, 매형 김성권 선생 역시 조국독립에 힘쓴 애국지사라는 것이다. 정부는 강영승 선생의 공훈을 기려 201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고국이 어려움을 겪던 시기 우리 선조는 이역만리 타향에서도 창의성과 실용정신을 바탕으로 발명활동을 했고, 이를 통해 얻은 수익을 조국 독립을 위해 아낌없이 내놓았다. 그들의 발명은 생계수단을 넘어 민족의 자존과 독립이라는 더 큰 꿈을 실현하는 도구가 됐다. 이는 기술과 애국이 만나는 지점에서 피어난 감동적인 서사이자 우리나라 발명 역사의 숭고한 정신을 보여주는 증표다.
선조의 발명정신을 기리는 일은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니라 미래를 여는 일이다. 특허청은 선조 발명가들의 업적을 밝혀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를 오늘의 교육과 정책, 문화로 확장해 미래세대에게 계승하고자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올해 발명의 날 60주년을 맞이해 거북선, 측우기, 금속활자 등 조선 시대까지의 대표적인 선조 발명품 14점에 명예 특허증을 발급하고, 애국지사이신 제1호 한국인 특허권자 정인호 선생, 제1호 미국특허출원 한국인 권도인 선생 등의 대표적인 발명품(말총모자, 대나무 커튼 등)을 전시하는 것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국권이 침탈된 암울한 시절, 기술과 아이디어로 조국독립의 길을 걸었던 선조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 선조의 발명과 특허가 조국독립을 위한 무기였다면 오늘날 발명과 특허는 기술 주권을 지키는 전략자산이다. 대한민국은 창의적인 발명정신과 기술혁신을 토대로 눈부신 성장을 이뤘지만 광복 80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기술 패권 경쟁과 국제통상환경의 불확실성 속에 놓여 있다. 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가 글로벌 경쟁에서 앞서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기술개발과 혁신이 사업화와 수출로 이어지는 선순환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지식재산 제도는 바로 이러한 생태계를 든든히 받치는 핵심 기반이다.
광복 80년, 발명의 날 60주년을 맞이하여 특허청은 앞으로도 우리 선조들의 소중한 정신과 유산을 이어받아 지식재산 제도발전을 통한 국가경쟁력 강화에 매진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선조들의 고귀한 희생을 계승해 나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김완기 특허청장 wankikim@korea.kr
〈필자〉핵심 전략산업 육성에 대한 전문성과 풍부한 정책 경험 등을 바탕으로 기술혁신·지식재산권 보호·명품특허 창출 등 주요 과업을 내실 있게 추진해 나가고 있다. 1971년생으로 대구 심인고와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했고, 서울대에서 행정학 석사, 미국 조지타운대 법학 석사, 서울대에서 법학 박사를 취득했다. 행정고시 39회로 공직에 입문한 뒤 산업부에서 소재부품장비산업정책관, 소재융합산업정책관, 통상정책국장, 무역투자실장, 대변인 등 주요 보직을 두루 거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