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지하철 역명에 담긴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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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에세이] 지하철 역명에 담긴 서울

지인들과의 자리에서 지하철 역명에 관한 질문을 받을 때가 많다. 자연스레 관련 기록을 찾아보는 일이 잦아졌다. 대부분의 역명은 인접 지명을 그대로 따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이야기가 숨어 있다.

한양도성 사소문 중 하나인 광희문은 조선시대에 시신을 도성 밖으로 운구할 때 지나던 시구문이었다. 그 길목에는 망자를 위로하는 신당이 들어서 훗날 신당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신당역은 이를 이어받았다. 응암역 역시 마을 뒤 백련산의 큰 바위가 매처럼 보여 매바윗골로 불린 응암동의 풍경을 담고 있다. 길이 좁고 험해 도적이 들끓던 버티고개 인근에 위장병에 특효인 약수터가 있어 이름 지어진 약수동의 전설은 약수역까지 전해졌다.

어떤 역은 개발로 사라진 마을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서울 성북구 돌곶이마을의 이야기는 돌곶이역에 스며 있고, 장승배기역에는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수호하던 장승배기마을의 흔적이 남아 있다.

지역을 대표하는 시설에 따라 역명이 정해진 경우도 있다. 동대문역, 시청역 등은 역명 자체가 이정표가 된다. 마포역은 한강 마포나루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의 상인과 물자가 이곳에 집결했고, 지금도 마포나루 새우젓 축제를 통해 그 시절의 풍요로움을 재연하는 행사가 매년 열린다. 고려시대 관리들의 녹봉을 관리하고 그 곡식을 보관하는 관청인 광흥창이 있던 곳에는 광흥창역이 세워졌다.

일부는 도시계획 속에서 새 이름을 얻었다. 역명이 바뀐다는 것은 과거를 딛고 새 기억을 써 내려가겠다는 선언과도 같다. 구로공단역은 첨단 벤처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 2004년 구로디지털단지역으로 간판을 다시 달았다. 동대문운동장역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운동장인 동대문운동장이 철거된 후 2009년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으로 거듭났다.

주민들의 뜻을 담아 이름을 바꾼 역도 있다. 비용이 많이 들고 절차도 까다로워 쉽지 않은 과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천역은 잠실새내역으로, 성내역은 잠실나루역으로 개명돼 잠실이라는 지역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냈다. 최근에는 당고개역이 서낭당에서 유래돼 낙후된 이미지를 준다는 의견에 따라 불암산역으로 다시 태어났다. 구의역(광진구청) 잠실역(송파구청)처럼 지방자치제가 자리를 잡으며 구청 이름이 역명에 병기된 것도 그 자체로 도시의 변화를 반영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지하철 역명을 되짚다 보면 과거 서울의 삶터가 눈앞에 펼쳐진다. 역명은 서울이라는 도시의 서사와 시간의 층위를 품고 있다. 때로는 시대를 증언하기도 한다. 만약 지하철역이 저마다의 이름을 갖지 않고 1번역, 2번역처럼 번호로만 불렸다면 지금처럼 많은 이야기를 남길 수 있었을까. 오늘 무심코 스쳐 지나온 역들을 다시 떠올린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이야기에 잠시 귀 기울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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