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무해한 것에 빠지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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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에세이] 무해한 것에 빠지는 이유

요즘 거리를 걷다 보면 자주 눈길이 가는 것이 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가방에 달아놓은 크고 작은 캐릭터 키링이다. 회사에서도 휴대폰과 노트북을 귀여운 스티커로 꾸미고 책상을 캐릭터 소품으로 채운 동료들을 자주 본다. 요새처럼 복잡하고 단단한 세상에서 마음 한편을 말랑하게 하는 풍경이다.

경기 침체와 사회적 불안 같은 뉴스가 끊이지 않는 요즘 작고, 귀엽고 순수한 이른바 ‘무해한 것들’에 마음이 끌리는 이유는 분명하다. 지친 마음을 붙들고 잠시라도 감정적으로 안전한 곳에 머물고 싶은 사람들의 바람이 일상의 선택을 바꿔놓고 있다.

무해함은 이미 우리 사회의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매년 소비 흐름을 전망하는 <트렌드 코리아 2025>도 귀엽고 순수하며 해롭지 않은 힘, 즉 ‘무해력’을 주요 트렌드로 꼽았다. 말 그대로 아무 위협이 없는 존재에게서 얻는 잔잔한 안정감이다.

콘텐츠산업 전반에도 무해력 열풍은 거세다. 어린이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캐릭터에 어른이 더 열광하고, 일상을 토닥이는 동물 콘텐츠와 산책 게임처럼 ‘느린 재미’가 주목받고 있다. 소비자들은 자극보다는 정서적 공감을 택하고, 심리적 위안을 주는 콘텐츠에 더 깊이 반응하고 있다.

23년 만에 실사로 돌아온 영화 ‘릴로&스티치’가 쟁쟁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 사이에서 기대를 모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릴 적 애니메이션으로 만난 귀여운 소녀 릴로와 깜찍한 외계 친구 스티치의 유쾌한 모험에서 어른들은 다시 그 시절 웃음과 감동을 떠올리며 위안을 얻는다. 스티치의 무해함은 단순한 귀여움에 그치지 않는다. 가족, 돌봄, 소속감, 그리고 정서적 안식처라는 본질을 담고 있기에 시대를 초월해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준다.

이처럼 캐릭터와 콘텐츠는 더 이상 단순한 소비 대상이 아니다. 때로는 감정을 대신 전하고, 때로는 조용한 위로가 된다. 누군가는 작고 귀여운 캐릭터와 어린 시절 본 애니메이션을 다시 보며 지친 오늘을 견디고, 내일을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마음이 지친 어른들에게 정서적 교감 대상이자 감정을 표현하는 매개체가 바로 이 ‘무해함’이다.

오랫동안 전 세계 사람과 감정적 유대를 쌓아 온 스토리텔링 기업의 일원으로서 무해한 것들이 가진 조용한 힘을 다시금 느낀다. 어린 시절 우리를 웃게 한 캐릭터가 어지러운 현실을 살아가는 어른이 된 지금도 마음을 어루만져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무해한 세계를 상상하고 만들어내는 일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더없이 소중한 일이 될 수 있다는 믿음. 그 믿음이 오늘도 우리가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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