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재 시장에서 구리는 ‘닥터 코퍼(Dr.Copper·구리 박사)’로 통한다. 글로벌 실물 경기의 선행지표 역할을 한다는 취지에서 이런 별명이 붙었다. 구리는 건설·기계·전자 등 다양한 산업에서 사용되는 금속으로, 전체 소비량의 50% 이상이 ‘세계의 공장’ 중국에서 쓰인다. 경기 침체 국면에 접어들면 중국 공장들이 구리 주문을 줄이고, 그 여파로 구리 가격이 내려가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최근엔 닥터 코퍼가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다. 중국 경기 침체에도 불구하고 구리 가격은 연일 상승세다. 주요 산업에서 전기 수요가 급증하는 구조적인 변화가 구리의 몸값을 띄웠다. 구리는 은에 이어 두 번째로 전기를 잘 통과시키는 금속으로, 전기 관련 설비와 제품이 늘어날수록 수요가 많아진다. 예컨대 전기차를 만들려면 내연기관차보다 다섯 배 많은 구리가 있어야 한다. 데이터센터도 ‘구리 먹는 하마’다. 인공지능(AI) 연산에 특화한 초대형 데이터센터를 지으려면 수만t의 구리가 필요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이 수입하는 구리 제품에 50%의 세율을 부과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래 산업의 필수 자원인 구리 공급망을 미국 내에 구축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미국은 구리 매장량이 많은 나라지만, 구리 제품 대부분을 수입하고 있다. 특히 정제 가공 단계에선 중국 의존도가 상당하다. 미국은 구리가 제2의 희토류로서 자원 무기화하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다. 다음 선거를 겨냥한 정치적 행보라는 분석도 있다. 미국에서 구리 광산이 몰려 있는 몬태나주와 유타주, 애리조나주 등은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의 핵심 지지층이 밀집한 곳이다. 구리 공급망이 구축되면 이 지역의 일자리가 늘어날 수 있 다.
구리에 대한 품목 관세는 트럼프 입장에서도 부담스러운 카드다. 자국 내에 구리 공급망을 구축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반면 구리 관세발(發) 인플레이션은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될 수 있다. 트럼프의 발언 직후 구리 가격은 사상 최고치(파운드당 5.68달러)를 경신했다. 미국이 인플레이션 압력을 버티며 ‘구리 독립’을 추진할 수 있을지 관심거리다.
송형석 논설위원 cli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