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의 넥스트 거버넌스] 〈4〉정치가 아닌 과학으로, 에너지 미래를 설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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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초빙석학교수·前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영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초빙석학교수·前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정치가 과학을 이겼습니다.”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결정 앞에서 과학자들이 고개를 떨구며 한 말이다. 이 한마디는 대한민국 에너지 정책의 현실을 압축한다. 탈원전으로 산업 생태계는 위기에 몰리고, 종사자들은 현장을 떠났다. 윤석열 정부 들어 원전이 다시 중심에 섰다. 고사 직전의 산업계는 가까스로 숨을 돌렸다. 그러나 정권이 또다시 바뀌자 원전은 다시 뒷전으로 밀리고, 재생에너지가 주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정권 교체 때마다 에너지 정책이 180도 바뀌는 혼란이 산업 기반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

대한민국은 기후위기와 에너지 안보라는 이중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인공지능(AI) 시대로 접어들며 전력 수요는 폭증하고 있지만, 에너지 자립도는 18%에 불과하다. 유럽연합(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와 RE100 압박 속에서 수출 기업들은 탄소중립 이행을 강하게 요구받고 있다. 안정적이고 저렴한 전력 공급은 이제 AI는 물론 반도체·배터리 등 국가 핵심 산업의 생명선이 되고 있다.

주변국들은 이념이 아니라 과학으로 답을 찾고 있다. 프랑스는 원전 비중 70%를 유지하며 재생에너지 병행을 확대하고, 중국은 2035년까지 원전 180기 건설을 추진 중이다. 미국도 2050년까지 원자력 발전 용량을 현재 대비 63% 늘릴 전망이다. 이들의 기준은 명확하다. 국익을 최우선에 두고, 그 달성 방안을 과학적으로 설계하고 있다.

이재명 정부는 AI 3대 강국을 외치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만 해도 올해 4461MW에서 2028년 6175MW로 늘어날 전망이다. 여기에 반도체·배터리·전기자동차 등 주력 산업의 수요까지 더해지면 필요한 전력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그러나 태양광은 하루 중 평균 15% 정도만 발전이 가능하고, 풍력도 25% 수준에 그쳐 전력 공급이 불안정하다. 이른바 '간헐성'의 한계다. 이를 보완할 에너지저장장치(ESS)는 기술과 경제성 모두 아직 미흡하다. 발전단가도 원전보다 40~50%가량 높다. 재생에너지 비중을 50% 이상으로 높인 독일의 전기요금이 유럽 최고 수준인 것이 이를 증명한다.

정부는 현실에 기반한 과학적 로드맵을 수립해야 한다. ESS 기술 고도화 일정, 송배전망 확충 계획, 발전단가 절감 목표, 간헐성 해결 방안 등이 구체적으로 제시돼야 한다. 또 기술과 비용이 확보되기 전까지는 원전을 포함한 에너지믹스로 전력 안정을 유지해야 한다. “지구를 지키자” “원전은 위험하다”는 감성적 구호는 국익을 희생시키는 또 다른 포퓰리즘일 뿐이다. 지난 50년간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내진 설계 기술로 원전을 안전하게 운영해왔다. 전력 부족으로 산업이 붕괴되는 것이 진짜 위험이다.

'기후에너지부' 역시 우려스럽다. '기후'가 앞서고 '에너지'가 뒤따르는 구조는 탄소중립이라는 이념이 에너지 안보보다 우선될 가능성이 크다. 산업부에서 에너지 정책이 분리되면 AI·반도체 등 산업과의 연계성도 약화되고, 정권 교체 때마다 조직이 또다시 해체될 우려가 있다. 에너지 정책이 정치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역사는 명확히 경고했다. 19세기 조선은 위정척사파와 개화파의 당쟁 속에 30년을 허비했다. 일본이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에 성공할 때, 조선은 철도가 풍수지리를 해친다며 반대하고 전신주를 부수었다. 과학이 아닌 명분, 실용이 아닌 의리가 국가를 망쳤다. 지금 우리는 그때와 다른 길을 걷고 있는가. 정파의 논리가 과학과 현실을 짓누르면 그 끝은 국가 쇠락이다.

지금이라도 과학자와 엔지니어가 기술중립적으로 에너지 정책을 설계하고, 정치는 이를 실행하는 구조로 바뀌어야 한다. 넥스트 에너지 전략 없이는 넥스트 코리아도 없다.

이영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초빙석학교수·前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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