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주장하는 제러미 벤담의 공리주의는 자유주의 사상과 민주주의 제도 발전에 크게 기여했지만 수많은 후세대 철학자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존 롤스가 대표적이다. 롤스는 저서 <정의론>에서 “공리주의는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의 권리를 희생시킬 위험이 있다”며 “사회는 가장 불리한 사람에게도 공정해야 한다”고 했다. 마이클 샌델도 공리주의를 공격했다. 어떤 선택이 ‘행복을 얼마나 많이 생산하느냐’만 따질 뿐 공동체적 정체성과 도덕적 가치를 무시한다는 점에서다.
지역화폐 등 대국민 현금 지원의 경제적 논거로 ‘호텔 경제학’을 내세웠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이번엔 도덕적 근거로 공리주의를 들고나왔다. 지난 21일 인천 유세에서다. 이 후보의 연설을 요약하면 이렇다.
“나랏빚이 1000조원이 넘었다며 절대 빚을 지면 안 된다는 무식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나라 1년 국내총생산(GDP)이 2600조원이다. 1000조원이면 국가부채가 50%가 안 된다. 코로나19로 경제가 어려울 때 다른 나라는 국민에게 현금을 나눠줘 국가부채가 110% 이상이 됐다. 반대로 한국은 국민에게 돈을 공짜로 주면 안 된다는 희한한 생각 때문에 빌려주기만 해 국가 대신 자영업자와 민간이 빚쟁이가 됐다. 이런 정책을 하는 사람이 서민과 대중이 아니라 보수 언론, 경제 관료, 대기업 임원 같은 힘센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힘센 소수가 아니라 힘 없는 다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정치이고 국정이다.”
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의 적정 수준에 관해선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다. ‘50%를 결코 넘으면 안 된다’는 생각은 일종의 ‘도그마’라고 여기는 사람이 기획재정부 내에도 적지 않다. 경제성장률이 잠재성장률을 밑도는 상황에서는 재정이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데 대부분의 주류 경제학자가 동의하기도 한다. 그러니 정부 이전 지출(대국민 현금 지원)이 GDP 증가에 미치는 승수효과가 0.2에 그친다는 등의 반론은 잠시 접어두자. 이 후보 말대로 빚을 더 내 국민에게 공짜 현금을 나눠주는 게 실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여전히 남는 질문이 있다. 현세대의 소득과 복지를 위해 나랏빚을 내서 현금을 뿌리는 것이 과연 ‘도덕적으로 공정한가’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나라 국가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예정이다. 빠른 고령화 때문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2060년 144.8%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이 후보가 언급한 다른 나라의 110%를 가뿐히 뛰어넘는다. 그나마 이 나라들은 미국, 일본 등 기축통화국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최근 한국의 올해 일반정부 부채비율(54.5%)이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비(非)기축통화국 평균(54.3%)을 처음 넘어설 것으로 전망했다. 2030년에는 59.2%로 비기축통화국 평균 53.9%를 5%포인트 이상 웃돌 것으로 봤다.
롤스의 공리주의 비판은 이 지점에서 유효하다. 현세대 다수의 행복을 위해 지금은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미래세대를 희생하자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샌델이 말하는 공동체적 가치에도 맞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공동체적 정체성은 미래세대를 위한 현세대의 희생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롤스는 공리주의 대안으로 ‘무지의 베일’이라는 사고 실험을 고안했다. 자신이 어떤 입장에 처할지 모르는 ‘원초적 입장’에서 사회적 정의 원칙을 정해보자는 것이다. 당장 현금을 받을 현세대가 될지, 그 빚을 떠안아야 할 미래세대가 될지 알 수 없는 상태라면 합리적 개인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