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직 변호사의 창의와 혁신] 〈60〉소설을 죽음에서 구한 작가, 보르헤스의 창의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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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직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디지털 생활자' 저자)이상직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디지털 생활자' 저자)

레이더장비 연구원 퍼시 스펜서는 간식으로 가져온 초콜릿이 실험 중에 녹아버렸다. 마이크로파가 원인이었고 음식을 데우는 전자레인지 발명으로 이어졌다. 레이더장비라는 영역에 갇히지 않고 가정용 전자제품이라는 '다른 영역'에서 필요한 창의를 끌어냈다. 보르헤스는 더 나간다. 1944년 단편집 '픽션들'에서 세상에 없는 특별한 '영역 그 자체'를 창조한다.

단편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에선 백과사전에 나오는 '우크바르'라는 지명이 실재하는지 찾아 나선다. 많은 증거가 발견되지만 모두 거짓이다. 17세기부터 시작해 가상의 지역과 그 언어, 문학, 철학, 역사를 사실처럼 조작해온 집단이 있었다. 기괴한 집단의 흥미로운 취미활동이나 이상향에 불과한 걸까. 우리가 과학기술로 덧대어 만든 온라인, 모바일, 메타버스는 무엇이 다른가. 그 위에 검색, 게임,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상거래가 이뤄진다. 인위적으로 만든 세상도 공동체의 가치를 더하면 풍요로운 '삶의 영역'으로 거듭난다.

그림작가 이소연 作그림작가 이소연 作

단편 '바벨의 도서관'은 어떤가. 도서관은 처음부터 무한하고 영원히 존재한다. 동일한 형태의 책장이 육각형의 진열실을 이뤄 사방팔방으로 연결, 변화, 지속된다. 25개의 철자와 기호의 조합으로 이뤄진 책이 수없이 존재한다. 세상의 모든 책이 있는 도서관은 진리의 우주다.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가치를 찾기 위해 도서관을 헤맨다. A라는 책을 찾기 위해선 그 장소를 가리키는 B라는 책을 읽어야 한다. B라는 책을 찾기 위해선 C라는 책을 읽어야 하는 등 삶을 허비한다. 불필요한 책을 찾아 제거하는 집단도 생겼다. 모든 책의 총론인 궁극의 책을 봤다고 알려진 사서는 신과 같은 취급을 받았다. 도서관은 무한하지만 주기적으로 반복된다. 무슨 뜻일까. 그는 묻는다. “내 글을 읽는 당신은 내 말을 이해한다고 확신하는가?” 그가 말하는 도서관은 우주다. 그러기에 그가 말하는 우주를 그조차 안다고 할 수 없다. 우리가 안다고 할 수도 없다. 작가와 독자는 각자의 방식으로 도서관을 이해하면 된다. 소설을 시작한 사람은 보르헤스지만 완성하는 것은 독자다. 그것이 보르헤스의 의도다. 작가의 영역을 넘어 '독자의 영역'으로 확장해 완성함으로써 소설가 자신의 영역도 완성한다.

단편 '원형의 폐허들'에선 깊은 잠에 들어 꿈을 꾸는 방식으로 환영을 만들고 그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을 다룬다. 온갖 난관을 겪은 끝에 생명을 만드는데 성공한다. 그런데 결국엔 꿈을 꾸는 자신도 누군가의 꿈속에서 태어나 길러진 환영에 불과함을 깨닫는다. 이 소설은 창조의 주체조차 창조의 대상이었음을 일깨운다. 창조는 주체와 대상을 순환시키며 무한히 이어간다. 인간이 만든 인공지능(AI)은 인간을 대신하는 창조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하다면 언젠가 'AI를 대신하는 창조의 주체도 나오지 않을까. 그것이 다시 사람일 수도 있을까.'라는 뜬금없는 생각까지 이어가게 만든다.

단편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은 첩보소설인데, 그 안에 또 다른 소설이 들어있다. 그 소설에 나오는 '미로'는 몇몇의 미래를 보여주는데, 몇 개의 시간을 동시에 창조하고 그것을 증식하며 갈라진다. A는 B를 죽일 수 있고, B가 A를 죽일 수 있고, A와 B가 모두 죽을 수 있다. 이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난다. 각각의 결말은 또 다른 갈라짐의 출발이 되고 결국엔 그 모든 길이 한군데 모인다. 갈라지는 시공간은 선택과 중첩을 통해 창조된다. 삶의 다양성도 선택과 중첩을 통해 넓고 깊어지는 것이 아닐까. 오프라인과 온라인 등 같은 시간에 선택과 중첩된 인생을 사는 현대인의 고민이 여기서 나온다.

그의 소설은 주인공, 줄거리, 순서가 없는 등 형식을 파괴한다. 실재와 허구의 경계를 없애고 내용의 모호함을 유지한다. 작가의 생각을 말하지만 이해를 구하지 않는다. 독자에게 자신의 소설을 끝내라고 주문한다. AI시대에 인간의 주체적 자의식을 되새길 기회를 준다.

이상직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디지털 생활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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