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이승우 기자 = 지적인 독설로 잘 알려진 영국 코미디언 리키 저베이스는 영화와 TV 쇼를 아우르는 저명한 상인 미국 '골든 글로브'의 단골 사회자이기도 하다. 그가 2016년 제73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 사회를 보며 내뱉은 독설 유머는 단순히 웃긴 것을 넘어 예리함의 정수였다. 영국 극작가 버나드 쇼의 촌철살인이 연상될 정도였다.
"놀림감 될 만한 스타들이 내가 사회를 봐서 이 시상식에 불참하려 한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다. 어떤 스타 배우가 나 때문에 상 받을 기회를 날리겠냐. 특히 그들의 영화 제작사들이 상에 대한 비용을 이미 지불해 놨는데 말이야." 할리우드 스타와 제작자 사이에선 폭소가 터졌다. 브래드 피트, 맷 데이먼 등은 허 찔린 표정으로 손뼉을 치며 자지러졌다. 일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실 이들이 크게 웃은 이유는 저베이스의 말이 할리우드에서 어느 정도 사실로 받아들여져서다. 금기를 후벼판 셈이었다.
골든 글로브와 함께 연예계에 세계적인 상이 몇 있다. 영화는 아카데미, TV 드라마는 에미, 팝은 그래미 등이다. 아카데미도 골든 글로브처럼 수상 적절성 논란이 끊임없고 뇌물성 로비가 공공연히 이뤄진다. 아카데미 주요 부문에서 수상하려면 오스카 캠페인으로 불리는 심사위원 대상 홍보 활동과 파티에 얼마나 많은 돈을 쏟아붓느냐가 관건이란 말은 비밀도 아니다. 캠페인 전문 대행사가 있을 정도다. 영화사당 평균 1천만 달러 넘는 캠페인 비용을 쓰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평균'이니 실제 수상하려면 얼마나 들까. 1956년 오스카에서 작품상 등 4개 부문을 휩쓴 '마티'는 제작비보다 캠페인에 더 많은 돈을 쓴 '영리한' 사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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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 진출한 한국의 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Maybe Happyending)이 8일(현지시간) 미국의 연극·뮤지컬계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는 토니상의 뮤지컬 작품상, 극본상, 작사·작곡상, 무대디자인상, 연출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사진은 '어쩌면 해피엔딩'의 브로드웨이 공연. 2025.6.9 [NHN링크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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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달리 연극·뮤지컬의 오스카로 불리는 '토니상'은 로비 논란 없이 비교적 공정하다고 평가받는 편이다. 영상 산업에 비하면 '가난한 동네'이기 때문일 듯하다. 이런 토니상의 올해 시상식에서 우리 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Maybe Happy Ending)이 자랑스럽게도 작품상을 위시해 6관왕에 올랐다. K-뮤지컬 역사를 새로 쓴 경사다. 우리 창작 뮤지컬 역사가 아직 일천하고 뉴욕 브로드웨이나 런던 웨스트 엔드보다 여전히 영세한 구조임을 감안하면 대단하다.
그런데 이처럼 높아진 위상에 맞춰 배우나 스태프에 대한 처우도 적절히 이뤄지고 있을까. 사실 국내 뮤지컬의 급성장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탁월한 재능으로 작품의 질을 높여온 배우와 스태프의 역량이 가장 큰 원동력이다. 자원도 없고 땅도 좁은데 사람만 많은 이 나라가 국제사회에서 살아남을 힘은 오직 질 높은 인적 자원을 무한경쟁시키는 방법밖에 없었다. 헝그리 정신과 투지를 강조했던 스포츠 분야가 그랬듯 K-뮤지컬도 예외가 아니었다.
뮤지컬 배우가 되려면 큰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 클래식이나 무용을 전공하거나 대학 뮤지컬과를 나온 사람도 있다. 이렇게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도 실제 무대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소수다. 보컬·댄스 학원까지 다니며 매년 수천 명이 오디션에 도전하지만, 무대는 제한됐다. 뮤지컬 관계자들 말을 들어보면 실제 기회를 얻는 건 10% 정도라 한다. 배역을 받았다는 기쁨도 잠시다. 저임금 구조 속에서 소수 주연급만 많은 출연료를 받고 '앙상블'로 불리는 나머지 배우들은 차비와 식비도 겨우 벌 정도라고 한다. 공연 회당 계약은 고사하고 합산하면 최저임금도 안 되는 한 달 계약을 하는 사례도 들어봤다.
공연 회당 수천만 원을 받는다는 건 조승우, 홍광호, 박효신 등 스타 배우에 한정된 이야기다. 시아준수, 옥주현 등 아이돌 출신도 높은 개런티를 받는다고 한다. 공연이란 건 당연히 수지가 맞아야 하는 사업이니 '스타 시스템'이 불가피한 특성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티켓 파워는 주연급 스타에 달렸기 때문이다. 주연급의 출연료를 낮춰 앙상블에 나눠주라거나 정부가 국민 혈세로 뮤지컬 배우들의 생계비를 보전하라 주장하려는 건 아니다. 그건 단순하고 위험한 논리이고 결과적으로 부작용이 크다. 다만 앙상블 배우들이 생계난 속에 "뮤지컬 배우 하지 말라"는 제목의 영상을 올리는 현상은 적신호일 수 있다. '어쩌면 해피엔딩'이 전해온 쾌거 속에서 우리 뮤지컬 업계도 묵묵히 땀 흘리는 앙상블 배우와 스태프의 처우를 개선할 합리적 방법을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그래야 K-뮤지컬 전체가 '어쩌면 해피엔딩'이 아니라 '예고된 해피엔딩'으로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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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5년06월10일 10시09분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