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세기부터 15세기까지 동남아시아의 패권 국가는 크메르 제국이었다. 캄보디아 남부 기반의 왕조가 힌두교를 받아들여 국가 기틀을 다졌으며 정복 전쟁을 통해 태국과 라오스의 대부분, 베트남과 말레이시아 일부까지 차지했다. 제국 중반 무렵인 11~13세기에 국력이 최고조에 달했으며 이때 많은 사원이 건립됐다. 앙코르 와트, 프레아 비헤아르, 반테이 스레이 등이다. 모두 힌두교 사원으로 지어졌으나 나중에 불교가 퍼지며 불교 사원으로 바뀌었다.
크메르 제국을 무너뜨린 국가는 아유타야 왕국이었는데 뒤를 이은 국가가 태국이다. 아유타야를 포함해 태국의 여러 왕조는 캄보디아를 수차례 침공했으며 크메르 문화재 및 캄보디아의 고대 유물을 약탈해 갔다. 태국은 크메르 때 수탈당한 것과 비교하면 약과라고 주장한다. 앙숙이 될 수밖에 없는 역사다. 그리스와 튀르키예, 인도와 파키스탄 비슷한 관계다. 다만 태국과 캄보디아는 지배 종교가 불교로 같아 다른 앙숙 국가들과는 차이가 좀 있다.
두 나라의 충돌이 현대에 들어와서도 계속되는 것은 캄보디아를 지배한 프랑스가 국경선을 일방적으로 그어버린 탓이 크다. 일례로 두 국가 경계 지역 525m 절벽 위에 세워진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은 두 나라 모두 소유권을 주장한다. 국제사법재판소(ICJ)는 1962년 캄보디아의 손을 들어줬지만 캄보디아뿐 아니라 태국 역시 인근에 병력을 배치해 두고 있다.
최근 무력 충돌이 격화한 것은 태국 탁신 가문과 캄보디아 훈센 가문의 대결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두 나라의 분쟁은 탁신과 훈센이 1992년 의형제를 맺으며 사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올초 영토 분쟁을 이유로 태국이 국경을 봉쇄하자 훈센 가문의 자금줄이던 카지노산업이 직격탄을 맞았다. 이에 훈센 측은 탁신의 딸 패통탄 총리가 자국 군부를 비난하는 통화 내용을 공개해 망신을 줬다. 이로 인해 갈등이 다시 폭발하며 전쟁 일보 직전까지 치달았다.
이번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관세 폭탄으로 위협해 무력 충돌이 일단락되는 분위기다. 하지만 갈등의 골이 워낙 깊어 817㎞ 국경선 전체가 화약고라는 평가다.
박준동 논설위원 jdpow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