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로] "먼저 인간이 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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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이승우 기자 = "먼저 인간이 되거라~". 공중파 TV 방송사가 2개 밖에 없던 1980년대에 MBC 일요일 프라임타임 프로그램인 '일요일 밤의 대행진'을 진행하던 코미디언 김병조가 전 국민에 유행시킨 말이다. 여기서 '인간'은 생물학적 인간이 아닌 은유적 표현이다. 당시 남녀노소 안 가리고 이 유행어를 받아들인 건 인간으로 태어났다 해서 모두가 '사람 노릇'을 하긴 어렵다는 데 공감했다는 뜻이다. 언론에서 흉악범과 패륜범을 묘사할 때 '인간의 탈을 쓴', '인면수심'(人面獸心), '사람이길 포기' 등 표현을 썼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일요일 밤의 대행진'은 슬랩스틱 형식의 콩트 대신 국내 최초로 뉴스쇼 형식을 채택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앵커 역할인 김병조는 처음 보는 시사 개그로 코미디 격을 높였다는 호평 속에 "먼저 인간이 되거라" 외에도 "인간아, 인간아 왜 사니", "제발 교양 있게 살아라" 등 메시지를 통해 '인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공무원, 기업인 등의 비리나 일반인의 공중도덕 부재 등을 풍자하며 썼던 멘트인 걸로 기억된다. 수직 사회였던 당시 분위기는 오피니언 리더, 우리말로 사회 지도층에 대한 도덕적 기대가 지금보다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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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날 달아드리는 카네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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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인성교육보다 '전인교육'(全人敎育)이란 용어를 많이 썼다. 공부나 일만 잘하는 게 아니라 부모에 효도하고 스승을 공경하며 사회 규범을 잘 지키고 자기 몸도 건강히 가꾸는 균형 잡힌 인간으로 아이를 키워야 한다는 철학이다. 아이가 잘못했을 땐 지금 기준으론 강한 제재를 하는 걸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학부모가 교사에게 '사랑의 매'나 '지도편달'(指導鞭撻)을 간곡히 부탁했을 정도다. 편달은 '채찍질한다'란 뜻이다. 요즘 유행하는 '감정 존중 양육'과 다르다. 그런데 그렇게 엄격히 큰 X세대보다 감정 존중을 받은 Z세대가 정신 트라우마로 치료를 훨씬 더 많이 받는다는 역설적 연구도 있다. 미국 언론인이 쓴 책 '부서지는 아이들'(The Bad Therapy)은 과거보다 온화한 환경에서 키운 아이들이 감사할 줄 모르며 부모를 더 원망한다고 지적한다.

교육학, 사회학 등에서 다뤄지는 '늑대소년' 이야기도 하나의 인간을 인간답게 키우는 게 쉽지 않은 일임을 보여주는 예화다. 숲에 버려진 아기가 늑대나 침팬지 같은 동물에 의해 양육되다 발견됐는데, 언어와 습성 등에서 인간의 특징을 보이지 못했고 인간 사회로 데려왔는데도 사회화와 소통이 힘들었다는 것이다. 전문용어는 '모글리 신드롬'인데, 모글리는 러디어드 키플링의 유명한 소설 '정글북'의 주인공이다.

세계적인 심리학자인 조던 피터슨 토론토대 교수도 베스트셀러 '12가지 인생의 법칙'에서 '아이를 제대로 키우고 싶다면 처벌을 망설이거나 피하지 말라'는 원칙을 제시했다. 남에게 책임을 돌리지 말라, 당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오직 어제의 당신과 비교하라, 세상을 탓하기 전 방부터 정리하라 등 시쳇말로 '꼰대 할배'같은 소리만 골라서 한다. 흥미로운 건 우리보다 개방적이고 수평적일 것 같은 서구 선진국들에서 이 '꼰대'의 책이 젊은이들 사이에 열풍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서구에선 아이들이 공공장소에서 뛰어다니거나 소리를 지르면 부모가 단호히 저지하는 모습을 흔히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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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인사청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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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부 출범에 따라 조각과 국회 인사청문회가 한창 진행 중이다. 인사청문회 도입 이래 항상 최대 이슈는 도덕성, 즉 인성이었다. 후보자 적격을 따질 때 업무 능력과 전문성보다 그가 살면서 사회상규상 '사람됨'의 도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는지에 초점을 뒀다. 이는 지금도 능력보다 인성을 중시한다는 방증일 테다. 공직 후보에겐 더 엄격한 잣대가 적용된다. 거짓말하지 않기, 부정하게 재산 안 모으기, 반칙하지 않기, 특권 남용하지 않기 같은 덕목을 원한다. 하지만 제도를 시행한 지 사반세기가 지났는데 쳇바퀴 돌 듯 같은 논란이 되풀이되는 건 우리 사회 인성교육 시스템의 허점을 드러내는 건 아닐까. 특히 '나나 내 가족이 하는 건 괜찮고, 남이 하는 건 나쁘다'는 이중잣대가 더 문제다.

leslie@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5년06월27일 12시51분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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