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칼럼] "졌지만 옳았다"는 보수의 집단 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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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칼럼] "졌지만 옳았다"는 보수의 집단 최면

“등 뒤에서 칼에 찔려(stab in the back) 졌다는 겁니까?”

제1차 세계대전 패전 직후 독일군의 최고 지휘관이던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미국 기자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는다. 전범들이 패전 책임을 유대인과 병역 기피자 등에게 돌리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내 말이 바로 그거요.” 독일군이 진 게 아니라 후방의 배신자들이 조국을 무너뜨렸다는 얘기였다.

‘돌히슈토스레겐데(Dolchstoßlegende, 등 뒤에서 칼 꽂기 신화)’는 그렇게 독일 사회를 잠식했다. 극우 인사들은 고개를 들었고, 칼날은 내부의 적을 향했다. 이 편리한 신화는 당장은 과거의 책임을 지우며 독일인의 자존심을 달랬지만, 훗날 아돌프 히틀러라는 더 극단적인 인사가 권력을 잡는 토양이 됐다.

요즘 대한민국 보수 진영에도 비슷한 징후가 감지된다. 국민의힘은 21대 대선에서 참패했다. 그러나 패인을 되짚고 성찰하려는 움직임은 거의 감지되지 않는다. 김용태 비상대책위원장이 내놓은 ‘5대 개혁안’은 몇주째 표류 중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반대 당론을 무효화하자는 등의 제안에도 전혀 무게가 실리지 않는다. 일부 의원은 오히려 ‘배신자’들의 이탈로 인한 당의 분열을 패인으로 꼽는다. “진영 전체가 똘똘 뭉쳐 탄핵에 끝까지 반대했더라면 정권을 빼앗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등 뒤에서 칼 꽂은 자’를 찾으려는 작당들이다.

[토요칼럼] "졌지만 옳았다"는 보수의 집단 최면

안타깝게도 이런 식의 집단적 자기 위안은 대개 더 나쁜 역사를 낳았다. 19세기 노예제 존폐를 놓고 벌어진 미국 남북전쟁에서 패한 남부가 그랬다. 노예제를 지지하던 백인 중심의 남부연합은 “전쟁은 졌지만, 대의명분 자체는 옳았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로스트 코즈(lost cause·잃어버린 대의)’ 신화다. 자성 대신 희생양을 찾으려는 움직임은 흑인을 향한 차별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됐고, 1876년엔 모든 공공기관에서 인종을 분리하는 ‘짐 크로법’까지 시행됐다. 미국은 이 어긋난 신화를 바로잡는 데 100년 가까운 세월을 들여야 했다. “졌지만 옳았다”는 사회적 집단 최면이 더 큰 오욕을 남긴 셈이다.

어쩌면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이후 보수 진영도 비슷한 최면 상태에 걸려 있던 건 아닐까. 많은 인사가 “계엄은 잘못됐지만 더불어민주당의 입법 폭주가 원인이었다”며 “당이 배출한 대통령을 지키는 건 정당으로서의 책무”라고 주장했다. 당시 한 국민의힘 의원은 “국정 지지율이 계엄 이후에 더 올라가지 않았느냐”며 “국민들이 그만큼 민주당을 향한 문제의식과 탄핵의 부당함에 공감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대다수 국민에게 계엄이란 그 못지않게 반민주적이고 비이성적인 행위였다. ‘8 대 0’이라는 극단적 스코어로 대통령 탄핵이 인용되고도 별다른 사회적 혼란이 없었던 건 어쩌면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틀린 건 아니다”라는 집단적 믿음이 실은 최면에 가까웠다는 것을. 탄핵 전 지지층 결집으로 급등했던 국민의힘 지지율도 대선 이후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한국갤럽이 지난 24~26일 전국 만 18세 이상 유권자 1000명을 대상으로 여론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국민의힘 지지율은 23%를 기록했다. 민주당(43%)과의 격차는 20%포인트로, 지난 5년 새 가장 크게 벌어진 수준이다. 한 국민의힘 중진 의원은 “예전엔 보수는 부패해도 유능하다는 믿음이라도 있었는데, 이제 유능함마저 진보에 빼앗긴 것 같다”고 했다.

모든 패전이 자멸로 이어진 건 아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진 일본 보수세력은 군국주의의 흔적을 지우고 ‘경제 재건’이라는 슬로건을 들었다. 전쟁에 대한 책임을 제대로 지지 않았다는 비판은 있었지만, 성장에 목마른 유권자들에겐 유능함이 우선이었다. 1955년 창당한 자유민주당(자민당)은 전후에도 수십 년간 장기 집권을 이어갔다.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새 옷으로 갈아입으려는 노력이 있다면 얼마든지 재기의 기회가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지금 국민의힘 앞에도 두 갈래 길이 놓여 있다. “우리가 옳았지만 졌다”는 자기 서사에 빠져 배신자 찾기에 골몰하는 길과 “졌기에 다시 태어나겠다”는 말로 새로운 신화를 써내려가는 길. 더 늦기 전에 이 집단 최면에서 깨어나야 하지 않을까. 참고로 ‘로스트 코즈’라는 단어는 요즘 ‘가망 없는 일’이란 뜻으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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