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이승우 기자 =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가 자동으로 미국 국적을 갖는 출생시민권 제도가 미국 28개 주(州)에서 한동안 폐지된다. 부모 국적이나 불법체류 여부와 상관 없이 미국에서 낳은 아기가 미국인이 됐던 속지주의가 50개 주 중 과반에서 사라진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행정명령에 따른 결과로, 소송을 제기해 효력중단 가처분 결정을 받은 22개 주에서만 출생시민권이 유지된다. 연방대법원은 이 결정이 소송을 안 낸 주에는 적용될 수 없다고 결정했다.
연방대법원은 하급심 법원 판결이 연방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해석했을 뿐, 행정명령의 위헌성은 판단하지 않았다. 리버럴은 이 명령이 수정헌법 제14조에 어긋난다고 주장한다. 제14조 1항은 '미국에서 태어나거나 귀화해 미국 관할권에 있는 모두는 미국 시민'이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보수 진영은 조문에 해석 여지가 많으니 시민권자·영주권자 자녀만 대상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연방대법원은 올가을 위헌 여부에 대한 심리를 시작할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정부는 대법관 구성 비율이 보수 절대 우위이므로 행정명령이 합헌 결정을 받을 것이라 예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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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결정은 세계적 파장을 낳고 있다. 미국은 캐나다 등과 함께 몇 안 되는 속지주의 선진국이어서다. 특히 세계 최강국이란 매력에 가장 이민 가고 싶은 나라 중 하나로 꼽힌 만큼 2세에게라도 미 국적을 주려는 사람들이 많다. 미국을 동경하는 사람들은 미국 국조(國鳥)가 독수리(흰머리수리)란 사실에 비유해 자녀라도 '독수리'를 만들고 말겠다는 욕망을 드러낸다. 하지만 미국은 이민법이 매우 까다롭고 큰 비용과 긴 시간이 드니 시민권은커녕 영주권 따기도 쉽지 않다.
'원정 출산'이란 편법은 그래서 등장했다. 원정 출산은 말 그대로 태어날 아기가 출생지주의 체제 국가의 국적을 얻도록 임신부가 해당국을 중단기 방문해 아기를 낳는 행위를 뜻한다. 속지주의를 악용한 것으로 아시아 지역민들, 특히 한국과 중국인들이 북미 원정 출산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징병제인 우리나라에선 병역 기피용으로도 활용될 수 있다. 지금도 인터넷 포털에 원정 출산을 검색어로 넣어보면 알선 업체들이 '효과적인 원정 출산 방법'을 광고 중일 정도다. 하지만 이번 결정으로 원정 출산을 계획 중이던 사람들과 관련 업체들은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과거엔 부유층이나 권력자들의 원정 출산 행위가 사회적 이슈나 정치적 논란이 됐다. 재벌가 원정 출산 실태를 파헤친다는 황색지 기사도 가끔 보였다. 법망을 교묘히 피해도 미국 원정 출산은 경제적·시간적 여유가 뒷받침돼야 하는 값비싼 행위다. 최소 몇 달간 물가 높은 미국에서 거주할 생활비가 필요하고 살인적인 미국 병원비도 감당해야 한다. 다만 부자가 아니라 약간의 여윳돈만 있더라도 "우리 아이 독수리 만드는 데 이 정도 비용은 감수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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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건 미국으로의 원정 출산이든, 자녀 유학이든, 이민이든 간에 뜨거운 '미국 사랑'은 정치적인 친미·반미 성향과 별로 상관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반미 활동을 오래 했던 정치인이나 단체 간부의 자녀들이 미국에서 고액 유학 중이거나 거주 중이란 뉴스가 잊을 만하면 나온다. 직장에서 언행은 반미 성향을 보이는데 해외 주재 지역 또는 연수 지역을 고를 땐 미국 아니면 안 된다는 이율배반 사례도 흔하다. 그런 걸 전문용어로는 인지부조화라고 한다.
미국과 정면 대결 중인 중국도 다르지 않다. 로스앤젤레스, 뉴저지, 북버지니아 등 학군 좋은 지역엔 중국 학생들이 부쩍 늘었는데, 부모가 공산당 간부인 사례가 많다. 중국에서 반미 선동으로 부를 쌓은 한 시사평론가는 미국에 고가 주택을 보유한 사실이 드러나 빈축을 샀다. 그러자 그는 "반미 하는 건 내 직업일 뿐이고 아내와 딸이 있는 미국에 온 건 생활일 뿐"이라고 해명해 논란을 키웠다. 중국도 우리도 '반미는 직업, 친미는 생활'인 자기부정 사례가 끊임없이 나오는 걸 보면 독수리가 좋긴 좋은가 보다.
leslie@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5년07월01일 06시59분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