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준의 인문학과 경제] 무더운 여름, 쉬는 이들과 쉬지 않는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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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혜준의 인문학과 경제] 무더운 여름, 쉬는 이들과 쉬지 않는 이들

한반도의 여름이 더 길고, 더 더워지고 있다. 더운 여름은 도시 생활자에게 특히 힘겹다. 도시가 만들어내는 인공 열기가 자연의 열기에 더해지기 때문이다. 여름 더위는 에어컨이나 자동차에서 나오는 열을 모르던 문명 이전 단계에서도 골치 아픈 난제였다. 중세 시대 서구 도시는 더운 여름과 직접 맞서 싸우는 대신 후퇴하는 전략을 택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여름철에 도시를 떠나 전원에서 지냈다. 중세 유럽 도시의 이 관행은 오늘날 세계 여러 나라에서 채택한 여름방학 제도에 남아 있다.

중세 유럽 도시에서는 더위도 문제였지만 여름이면 극심해지는 전염병이 공포의 대상이었다. 성벽으로 에워싸인 도시들은 인구밀도가 매우 높았다. 작은 공간에 몰려 사는 사람들이 배출하는 오물이 거리에 넘쳐났다. 그러나 오물 처리 시설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시민들이 적당히 알아서 도시의 성 밖에 갖다 버렸다. 날씨가 무덥지 않으면 쓰레기 악취를 그런대로 참아낼 수 있었다. 문제는 여름철이었다. 사방에 쌓인 오물은 빠르게 부패했고 벌레와 쥐가 급속히 번식했다. 이런 환경에서 전염병 바이러스는 퍼져나갔고, 도시인들을 감염시켜 심한 경우 사망에 이르게 했다.

이렇듯 위험한 계절인 여름에도 일하고 장사하며 먹고사는 서민들은 하던 일을 내려놓고 도시를 떠나 쉴 자유를 누릴 수 없었다. 여름에 도시를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전원에 농지를 소유한 지주 계층의 부유층이었다. 지주의 여름휴가를 모방한 다른 직종도 등장했다. 볼로냐, 파리, 프라하 등 중세 도시에 대학이 생겨나자 대학교수와 학생들도 덥고 위험한 여름철에는 도시를 떠나 고향 시골이나 기타 전원 지역에서 여름을 보냈다. 영국 런던의 고등법원 판사들도 여름에는 재판을 멈추고 쉬었다. 의회 정치가 일찍 자리 잡은 영국에서는 하원의원들도 여름에는 모두 각자 지역구 고향으로 돌아가서 쉬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도 교육 종사자들은 여름에 일을 멈춘다. 그러나 근대 영국과 달리 법원의 판사들은 긴 여름방학을 즐기지 않는다. 특정 정치인 피고인에게는 여름은 물론 사계절 내내 재판을 쉴 수 있도록 배려할 따름이다. 국회의원들도 여름이라고 해서 조직에 충성하는 일사불란한 집단행동을 멈추지 않는다. 다만 이런저런 명목을 내세워 해외에 다녀올 따름이다. 근대 영국 하원의원은 여름 휴가비를 전액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꺼내 썼다. 20세기 초까지 하원의원은 봉급도 수당도 없는 무보수직이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첨단을 달리는 대한민국에서는 이런 ‘야만’을 말끔히 제거했다. 언제 어디서건 오로지 나라를 위해 사는 의원님이 쓰는 돈은 유권자인 국민이 세금으로 대준다.

중세 유럽 도시에서처럼, 대한민국 도시에도 생업을 위해 더운 여름날 땀 흘리며 일해야 하는 이가 많이 산다. 날로 열악해지는 조건 속에서도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고 커피를 내리는 1인 사장님들, 더위를 무릅쓰고 음식 배달로 생계를 이어가는 이들. 이분들이야말로 우리 도시의 삶을 지탱해주는 일등 공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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