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해운대 대로변 목이 좋은 곳에서 대형 커피숍을 운영하는 A씨. 오전 8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영업하는 A씨는 ‘비영업 시간대 놀리는 가게 외벽 유리창을 활용해 디지털사이니지 광고를 하면 어떨까’란 생각을 떠올렸다. 새벽 시간대별로 삼성의 최신 휴대폰 갤럭시S25나 현대자동차 신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팰리세이드를 노출시키는 식이다. 광고 영상 송출은 블록체인이 담당하고, 광고 수익은 토큰으로 지급받는다.
실물자산토큰(RWA)으로 본 토큰 경제, 토크노믹스의 예시다. 네이버 카카오 두나무 등 주요 정보기술(IT) 기업의 최근 화두인 스테이블코인도 토큰의 일종이다. 미국 상원은 지난달 달러에 연동하는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규제 법안인 지니어스법을 통과시켰다. 한국 국회에도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 허용 등을 담은 디지털자산기본법이 발의됐다. 스테이블코인 활성화는 이재명 대통령의 공약이기도 하다. 블록체인 투자사인 해시드오픈리서치 김용범 전 대표를 초대 대통령실 정책실장에 임명하며 이런 의지를 분명히 했다. 각국 중앙은행들도 분주해졌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1일 포르투갈에서 제롬 파월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등과 만나 스테이블코인 관련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스테이블코인 선도업체 미 증시 상장
대표적인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인 테더(USDT)의 연평균 시가총액은 2015년 약 45만달러에서 2020년 73억달러로 급증했다. 2025년 6월 30일 기준으론 약 1600억달러에 육박했다. 스테이블코인 USDC 발행사 서클은 지난달 업계 최초로 미 뉴욕거래소에 상장했다. 스테이블코인은 크게 세 종류로 나뉜다. △테더나 서클같이 달러 가치에 연동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에 연동 △수학적 알고리즘 기반 자체 가치 창출이다.
수년 전부터 국제기구들이 선도적으로 스테이블코인을 도입하고 있다.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은 2020년 9월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하는 인도주의적 지원 프로그램 ‘빌딩블록’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듬해 1월 시리아 난민캠프에서 빌딩블록 사업을 처음 시작했고 같은 해 6월엔 우크라이나전쟁으로 발생한 난민에게 긴급 구호물자 명목으로 스테이블코인을 지급했다. WFP는 2022년 기준 15개국 100만여 명에게 스테이블코인을 줬다.
유엔개발계획(UNDP)도 적극적이다. 마르코스 아티아스 네토 UNDP 사무차장은 2019년부터 SK그룹과 스테이블코인 도입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최초의 블록체인 기반 스테이블코인 플랫폼 개발사 이아이옵(EIOB)의 진성한 대표가 당시 이 실무를 총괄했다. 진 대표는 SK텔레콤에서 25년 넘게 재직하며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과 연구개발(R&D)을 이끌었다. 에스토니아 등 일부 국가와 SK텔레콤, 다양한 비정부기구(NGO)와 SK텔레콤 간 협력 관계도 새로 구축했다. 그는 네이버 삼성 LG전자 KT 현대차 등이 참여해 만든 인공지능 연구소 ‘AIRI’ 설립도 주도했다. 진 대표는 ‘페이팔 마피아’의 일원이자 전문 투자자인 척 응 유레카테라퓨틱스 창업자를 이아이옵 글로벌 최고전략책임자(CSO)로 영입했다.
◇토크노믹스에 ‘진심’인 유엔
이아이옵이 자랑하는 기술은 거래 속도와 안전성이다. 권위증명(PoA) 기반 시스템으로 자체 메인넷을 구축해 0.303초당 블록 1개를 생성할 수 있게 했다. 이더리움(12~15초) 대비 약 40배 빠르고, 초고속 블록체인 플랫폼인 솔라나(0.3~0.4초)와 비슷한 수준이다. 최적화된 블록 엔진과 경량화된 합의 메커니즘을 통해 노드 간 병렬 처리 속도를 최대한 끌어올렸다는 설명이다. 블록 생성 속도(거래 처리 시간)가 빠르면 빠를수록 사물인터넷(IoT) 센서 데이터와 연계가 용이하다. 예를 들면 탄소배출권 거래제를 활용하려는 기업들이 공장 곳곳에 센서를 설치하고, 이 플랫폼을 통해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는 뜻이다. 중앙은행 발행 디지털화폐(CBDC)와 연계할 때도 유리한 편이다.
이아이옵과 블록체인 지갑 스타트업 아이오트러스트는 최근 런던증권거래소와 함께 파라과이 내 수조원에 달하는 협동조합 자금을 스테이블코인화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이아이옵은 오는 8월 UNDP가 온라인으로 여는 지속가능한 개발 목표(SDG) 블록체인 해커톤에 참여한다. UNDP 사업에 부합하는 스테이블코인 플랫폼 구조 설계, RWA 토큰화 설계 등 실력을 겨룬다. 진 대표는 “원화 가치에 연동된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면 국채 수요 확대 등 ‘바이 코리아’ 저변과 원화 유동성을 현재보다 확대할 수 있다”며 “지속 가능한 토크노믹스를 실현할 것”이라고 말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9일 서울 용산 드래곤시티에서 블록체인 수요-공급자 협의체 에이블 2025년도 1차 정례회의를 연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관계자는 “미국 도널드 트럼프 2기 정부 출범 후 스테이블코인이 활성화되고 있고, 유럽연합(EU)이 디지털자산 최초 포괄규제인 MICA(가상자산시장법안)를 시행하는 등 글로벌 환경이 변하고 있다”며 “국내 블록체인 산업 경쟁력 강화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라고 말했다.
이해성 기자 i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