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북문에 위치한 주택가의 주말은 한가로웠다. 마을버스가 오르막길을 따라 오르고, 산책로는 야트막한 높이의 뒷산으로 이어졌다. 두 개 동으로 이뤄진 다세대주택이었는데, 아래쪽 건물에서는 입주민으로 보이는 여성 두 명이 마당에 나와 풀을 뽑고 있었다. 이들은 택시에서 내린 우리가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저 윗집이에요” 하고 가르쳐줬다.
노 씨의 집은 소담했다. 주방과 거실에 딸린 작은 창문으로 녹색숲이 일렁였고, 직접 그린 새 그림과 틈날 때마다 모은 공예품이 곳곳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종이죽으로 만든 새, 분재로 키우는 배나무, 산책길에 주워 온 나무껍질…. 손상우 작가와 협업해 레진과 한지로 만든 사각판도 인상적이었는데, 맞은편 집에서 안이 들여다보이는 걸 막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창문에 필름을 붙이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었지만 집으로 들어오는 빛의 명암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단다. 벽걸이 에어컨을 삼베로 덮어놓은 손길이며, 주방 천장 아래로 보름달 같은 한지 조명을 매단 솜씨에서도 내 집을 가꾸는 바지런한 손길과 마음이 느껴졌다.
거주하는 집에서 자신의 시간과 물건을 전시하는 이유는 이랬다. “3년 전 개인적으로 힘든 시간을 겪었는데 산책을 하면서 조금씩 치유되는 경험을 했어요. 오랫동안 새를 바라보기도 했어요. 창공에서 날개를 펼치고 바람을 느끼며 놀이하듯 가만 떠 있는 새가 무척 자유로워 보이더라고요. 집으로 돌아와 종이죽으로 새를 빚고 새 그림을 그렸지요. 우리는 사회에서 다 호칭으로 불리잖아요. 과장님, 실장님, 선생님…. 그런 것들이 재미없게 느껴졌고, ‘나’라는 사람을 이런 식으로 보여주고 싶었어요.”이곳에 집을 구하게 된 배경도 자연스레 화두가 됐다. 어느 날 흘러들 듯 이 동네에 온 그는 여기 정서가 마냥 좋아 옆 건물에 세를 구해 살다가 다락방 딸린 이곳이 나왔다는 소리를 듣고 또 한 번 이사를 했다.
햇반마저 고가구에 쌓아두는 선비 같은 청춘의 집은 어떤 모습일까? 가벼운 호기심으로 시작한 나들이였는데 제법 큰 여운이 남았다. 무엇보다 내 공간을 단장하는 능력과 힘. 이렇게 열과 성을 다해 가꾼 집에 살면 그곳에서부터 나의 모든 가능성이 커지는 것 아닐까. ‘옵션’이 많은 인생이 럭셔리한 인생이라고 한다면 어떤 주거 형태든 기꺼이 ‘내 집’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이의 내공은 얼마나 단단한 것인지. 그런 면에서 공간적 자립은 삶의 여정에서 중요한 단계다. 그렇게 자립으로 이뤄낸 ‘예술적’ 공간에는 필시 ‘값이 없는 자유’가 흘러넘칠 것이다.
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건축가가 지은 집’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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