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서니 첸 감독 "백두산 오르자마자 '엔딩은 이곳에서' 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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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둥위 주연 中 영화 '브레이킹 아이스'…젊은 세대 불안·성장 그려

"단군 신화 감동 녹여…촬영지 연길, 경계선에 선 인물들 은유"

이미지 확대 영화 '브레이킹 아이스' 연출한 앤서니 첸 감독

영화 '브레이킹 아이스' 연출한 앤서니 첸 감독

[찬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다음 달 4일 개봉하는 앤서니 첸 감독의 중국 영화 '브레이킹 아이스'에는 한국 관객을 반갑게 할 장면이 여럿 나온다.

주인공들은 K팝이 흘러나오는 클럽에서 춤추고, 술을 마신 뒤에는 해장을 위해 한국 컵라면을 먹는다. 거리는 한글 간판을 단 가게로 빼곡하다. 우리나라의 대표 민요 '아리랑'과 남북 평화를 상징하는 노래로 꼽히는 '반갑습니다'를 부르는 장면도 나온다.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눈으로 뒤덮인 백두산이 클라이맥스에서 등장한다는 점이다. 만물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듯한 백두산의 설경은 장관이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처음엔 단순히 중국의 북쪽 지방에서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친구 하나가 백두산이라는 곳을 소개해줬죠. 구글맵에 검색해 로드뷰를 보는데 너무 아름다웠어요."

한국 개봉을 맞아 서울을 방문한 첸 감독은 30일 서울 마포구에서 한 인터뷰에서 백두산을 처음 접했을 당시를 떠올리며 "(백두산의) 매력에 푹 빠졌다"고 설레는 얼굴로 말했다.

이 영화는 조선족이 전체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연길 지역을 배경으로 한다. 관광 가이드인 나나(저우둥위 분), 상하이에서 온 엘리트 하오펑(류하오란), 이모 가게에서 일을 도와주는 샤오(취추샤오)의 불안과 성장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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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브레이킹 아이스' 속 한 장면

[찬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첸 감독은 "연길과 백두산을 배경으로 한 건 우연한 결과였다"고 설명했다.

그는 젊은 인물들이 나오는 겨울 배경의 영화를 찍겠다고 마음먹은 뒤 막연히 중국에서 가장 추운 곳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싱가포르인인 첸 감독은 2021년 10월 중국에 입국해 21일간 호텔에 머물며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입국자가 3주간 의무적으로 격리해야 했던 때다.

첸 감독은 "서로 잘 알지 못하는 세 청춘을 주인공으로 하되 이야기의 시작은 도시에서, 마무리는 광활한 자연에서 펼치기로 계획했다"며 "격리가 끝난 다음 날 프로듀서와 함께 백두산을 등반했는데, 올라가자마자 '이 영화의 엔딩은 이곳이다' 확신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한국인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단군 신화도 이 영화에서 중요한 설정으로 다뤄진다. 단군 신화에 관해 어렴풋이 알고 있던 첸 감독은 곰과 호랑이가 마늘과 쑥을 먹었던 곳이 백두산으로 전해 내려온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이 이야기를 영화에 넣기로 했다.

"(주변의) 한국 사람들은 만나기만 하면 자기가 곰의 자식이라고 말하더라고요, 하하. 곰과 호랑이가 백두산에서 인간이 된다는 신화를 영화에 넣는다면 감동적으로 다가갈 거라 생각했죠. '아리랑'을 넣은 것도 같은 이유예요. 가사에 백두산이 나오는데 이 노래만큼 한국을 대표하는 곡이 없다고 판단했어요. 조선족 가이드가 백두산을 '장백산'(백두산의 중국 명칭)이라 부르는 게 어떻겠냐고 했는데 거절했습니다. 한국인에게 신성한 곳인 데다 저도 백두산으로 알고 있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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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브레이킹 아이스' 속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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첸 감독은 자칫 단군 신화를 중국의 신화로 오해할 소지가 있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내가 느낀 감동을 영화에 녹여내고 싶었을 뿐, 영화 외적인 시각으로 볼 때 생길 수 있는 사회·정치적인 문제에 관해선 큰 고심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단군 신화가 한국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신화인지도, (한중 역사 문제의) 민감성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 무서운 호랑이가 포기할 만큼 힘든 굶주림을 곰이 참아내 드디어 인간이 됐다는 이야기의 울림이 컸어요. 그런(사회·정치) 문제는 제게 핵심이 아니었죠. 신화나 전설을 그런 맥락으로만 읽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인물과 스토리, 엔딩, 설정까지 정리한 그는 영화의 주 무대가 되는 도시를 찾아야 했다. 백두산과 멀지 않은 도시를 훑어보다가 연길을 알게 됐다고 한다.

첸 감독은 "중국의 다른 도시들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의 연길을 보고서 '대체 여기가 어디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며 "중국 북동부에서 영화를 찍는다고 하면 범죄 영화나 우울한 영화가 떠오르는데 연길은 상하이나 베이징보다 화려하고 볼거리가 많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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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브레이킹 아이스' 속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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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 도시라는 지역적 특수성도 첸 감독의 마음을 잡아끈 요인 중 하나였다. 중국의 사회 시스템에 환멸을 느끼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탕핑'(탕평·躺平) 세대의 무력함과 불안을 표현하기에 이 장소가 적격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팬데믹 때 중국 청년들이 그동안 억눌린 감정을 분출했어요. 부모 세대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없을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을 내놨죠. 연길에 도착한 직후 여기가 각자 삶에서 길을 잃은 청년이 만나는 완벽한 곳이 되겠구나 싶었어요. 국경 도시라는 점 자체가 모호한 경계에 놓인 세 사람의 상황을 은유적으로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죠."

이 영화는 제76회 칸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상영된 이후 주요 외신으로부터 "올해 칸영화제 초청작에서 최고의 작품 중 하나"라는 호평을 받았다.

첸 감독은 "감독으로서 내가 아름답고 시적이라고 느낀 것들을 카메라로 포착할 뿐"이라며 "한국 관객도 편견 없이 이 영화를 관람해주면 좋겠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스토리를 따라가 주기를 부탁드린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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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브레이킹 아이스' 속 한 장면

[찬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rambo@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5년05월30일 16시33분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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