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병채의 센스메이킹] 〈88〉AI 블라인드, 매끄러운 전략의 실패

1 day ago 1
손병채 ROC(Reason of creativity) 대표손병채 ROC(Reason of creativity) 대표

최근 몇 개월간 대형 컨설팅사에서 받아보는 기업 전략 보고서들이 주니어 또는 중간급 컨설턴트들의 인공지능(AI) 작업 결과물로 대체된 듯하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분명 매끄러운 초기 논리 전개와 정제된 요약들이 눈에 띄지만, '결론은 여전히 모호하다'는 불평이 따라붙는다.

문제는 이 보고서들이 일정 수준까지는 그럴듯하다는 데 있다. 구조도 탄탄하고, 인사이트도 흥미롭다. 그러나 정작 방향을 정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AI가 만들어낸 그럴듯한 문장들은 침묵한다. 겉보기에 정제된 이 문서들이 오히려 판단력을 흐리게 만드는 현상, 바로 '매끄러운 실패(polished slop)'가 전략의 이름으로 유통되고 있다.

최근 링크드인에서 두 브랜드 전략가들이 커스터마이징 된 챗GPT를 활용해 다양한 목적의 클라이언트 브리프에 대응하는 과정을 분석한 실험 결과를 공유한 바 있다. 흥미롭게도 AI는 로밍(roaming), 즉 전략 초기 단계에서의 탐색과 기회 지형 그리기에는 강점을 보였다. 하지만 호밍(homing), 즉 우선순위를 정하고 한 방향으로 수렴하는 과정에는 뚜렷한 한계가 드러났다.

이는 AI가 근본적으로 판단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발생한 결과라 할 수 있다. AI는 모호성과 긴장을 통합하는 대신, 가능한 모든 가능성을 요약하고 나열하는 데 그친다. 그것이 때론 지적 호기심을 자극할 수는 있지만, 전략은 결국 '어디로 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기에, 이 같은 방향 없는 풍성함은 오히려 위험하다. 이 지점에서 본질적인 질문이 떠오른다.

우리 조직은 스스로 방향을 정할 수 있는 문화와 목적을 갖고 있는가?

많은 조직은 데이터를 쌓고, AI를 도입하고, 다양한 분석 툴을 운영한다. 그러나 그 데이터를 무엇을 위해 쓰는지, 우리는 어떤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는지, 무엇을 '좋은 데이터'라고 부를 것인지에 대한 합의는 없다. 조직 내 공유된 해석이 없다면, 데이터는 방향을 주지 않는다. 결국 AI는 주는 대로 해석하고, 인간은 그럴듯해 보이기에 받아들인다. 이 위험한 의사결정의 자동화가 만들어내는 건, 전략이 아니라 환상에 가까운 결과물이다.

철학자 알래스터 매킨타이어는 '덕의 상실(After Virtue)'에서 자신에게 '내가 어떤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가'가 아니라, '이미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를 물었다. 전략은 창조적 선언이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맥락과 실천의 연속선상에서 길어내야 할 질문이기에 그의 메시지는 지금 우리에게 전략의 출발점을 다시 묻게 한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어떤 제품을 만들고, 어떤 서비스를 제공하며, 어떻게 일해왔는지가 곧 우리 조직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기반으로 시작할 때에만 데이터는 의미를 갖고, AI는 비로소 올바른 방향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결국 AI 전략의 성패는 기술이 아니라 공유된 해석의 문화, 다시 말해 조직 내 실천과 목적의 일관성에서 갈린다. AI는 문제를 빠르게 재정리해주지만, 무엇이 중요한지 판단하고,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일은 인간의 몫이다. 그리고 그 판단은 단순한 매 상황마다의 논리의 결과가 아니라, 공동체의 목적, 가치, 경험의 총합에서 나온다.

즉, 전략은 예측이 아니라 해석이다. 해석은 방향의 문제이고, 방향은 결국 우리가 누구인지를 묻는 일이다. AI가 아무리 정교해져도,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만큼은 인간만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다.

손병채 ROC(Reason of creativity) 대표 ryan@reasonofcreativity.com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