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최재석 선임기자 = 간첩으로 몰려 결국 사형까지 당한 고 오경무씨와 유족이 최근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오씨가 사망한 지 53년 만이다. 사후에라도 뒤늦게 억울한 누명을 벗었으니 좀 더 편히 잠들었으면 한다. 조작된 간첩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는 뉴스는 잊을 만하면 나온다. 그만큼 권위주의 정권 시절 간첩 조작이 많았다는 방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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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박동주 기자 = 서울 성북구 정릉동 성가소비녀회에서 국가폭력 피해자를 돕기 위한 '김근태 기념 치유센터' 개소식이 열렸다. 사진은 집단 치유 공간인 '함께 마음 여는 방'의 모습. 2013.6.25
오씨 가족에게 불행이 시작된 것은 1966년이다. 제주도에서 감귤 농사를 짓던 오씨의 동생 경대씨에게 6·25 때 실종된 이복형이 찾아와 그를 일본에 가자며 속여 북한으로 데려갔다. 경대씨는 간신히 제주도로 돌아왔지만 이복형의 협박으로 형을 연결해줬고 경무씨도 속아 북한에 갔다. 경무씨는 사상교육을 받고 남한으로 돌아온 뒤 해당 사실을 당국에 신고했다. 그러나 국가는 오씨 형제를 '간첩'으로 만들었다. 가혹행위와 거짓 자백이 있었다. 형제는 이듬해 각각 사형과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여동생도 간첩행위를 도운 혐의로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경무씨는 1972년 사형이 집행됐다. 가족들이 두 차례나 사형 집행을 멈춰달라며 재심을 청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군사정권이 끝나고 민주화가 돼서야 뒤늦게 재심할 수 있었다. 동생 경대씨는 먼저 2020년 무죄 판결을 받고 검찰의 항소 포기로 무죄가 확정됐다. 경무씨와 여동생은 2023년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지난해 8월 항소심에 이어 지난달 29일 대법원에서야 최종 무죄가 됐다. 검찰이 1심 무죄에 불복해 항소와 상고를 계속했기 때문이다.
간첩 조작 사건은 부끄러운 국가 폭력의 역사다. 그것을 방관해온 우리 공동체의 역사이기도 하다. 과거 정통성이 취약한 정권들은 '정권 안보용'으로 간첩 사건을 수시로 만들었다. 평범한 시민이 어느 날 갑자기 수사기관에 끌려가 모진 고문과 인권유린을 당한 끝에 '간첩'이 되고 만다. 검찰과 법원 단계에서도 이를 바로잡지 못했고 오히려 방조하기도 했다. 신문과 방송에서는 '고정간첩'이라는 이름으로 관련 사건이 대서특필되기 일쑤였다. 언론은 수사기관이 불러주는 대로 기사를 받아쓰다시피 했다.
사건 발생 후 재심 무죄판결까지는 너무나 긴 시간이 걸렸다. 피해자들에겐 고통과 눈물로 가득한 세월이었다. 조작 간첩 피해자들은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면서 오랜 감옥생활을 견뎌야 했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사회의 차별과 감시의 고통을 참아야 했다. 반공이 모든 가치보다 앞섰고 '간첩'이라는 낙인의 굴레를 감히 벗어버릴 생각조차 하기 어려웠던 시절이 그리 멀지 않은 과거였다. 수많은 조작 사건이 재심을 통해 진실이 밝혀지고 있지만 피해자들의 잃어버린 삶을 온전히 되돌린 순 없다. 사형된 지 53년 만에 누명을 벗은 이도 이미 세상에 없다.
우리 사회가 국가폭력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다름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법과 제도를 고쳐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시대가 변하면 국가 폭력의 형태도 변할 수 있고 언제든 누구에게든 그 피해가 닥칠 수 있다. 과거 군부정권 시절 간첩으로 몰렸다가 재심을 통해 명예를 회복한 사람들은 국가로부터 받은 배상금을 출연해 재단법인 '진실의 힘'을 만들고 "인간의 삶은 폭력보다 강하다"라는 믿음으로 국가폭력 희생자들을 돕고 있다. 어두운 과거는 밝은 미래를 만드는 자산이 될 수 있다.
bondong@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5년06월27일 11시46분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