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환한 멕시코 마약상의 구원 향한 여정…'에밀리아 페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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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최다 부문 후보작…뮤지컬·범죄·스리러·로맨스 넘나들어

이미지 확대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 속 한 장면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 속 한 장면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얼마나 더 고개를 숙여야 할까 / 얼마나 더 저들의 신발까지 핥아야 할까 / 얼마나 더 내 능력을 허비해야 할까…"

젊고 야심 찬 여성 변호사 리타(조 샐다나 분)가 신세를 한탄하며 노래한다. 그는 아내를 살해한 남자를 무죄로 만들어주고 이제 막 법정을 나선 참이다.

그가 양심을 판 대가로 받는 건 얼마 안 되는 월급뿐이다. 때마침 낯선 남자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고,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을 듣는다. 자기를 도와주면 어마어마한 부자로 만들어줄 테니 일단 만나자는 것이다.

괴한들에게 납치돼 끌려온 그의 앞에 앉은 남자는 '마약왕' 마니타스(카를라 소피아 가스콘). 저음의 허스키한 목소리와 얼굴에 새긴 문신, 백금으로 뒤덮인 치아에서 위압감이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마니타스의 입에서 나온 말은 더 뜻밖이다.

"나는 여자가 되고 싶어"

프랑스의 거장 자크 오디아르 감독이 연출한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는 멕시코 마약 카르텔의 수장 마니타스가 성전환 수술을 통해 여자로 살게 되며 겪는 일을 그린다. '디판'(2015)으로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안은 오디아르 감독이 처음으로 도전한 뮤지컬 영화다.

그는 6년 전 프랑스 작가 보리스 라종의 소설 속에 성전환 수술을 받고 싶어 하는 마약상이 등장하는 것을 보고서 영감을 얻어 시나리오를 썼다. 처음엔 오페라로 무대에 올릴까도 생각했지만, 뮤지컬 영화로 방향을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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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에밀리아 페레즈' 속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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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마니타스가 성전환 수술을 받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과 이후 신분을 위장해 에밀리아 페레즈라는 이름의 중년 여성으로 새 삶을 개척해 나가는 과정을 따라간다. 과거의 죄를 씻고 구원을 향해 한발한발 나아가는 여정이 영화의 큰 줄기다.

리타는 그에게 저명한 의사를 소개해주고 4년 뒤에는 두 아들과 만나도록 도움을 준다. 자기를 마니타스의 친척이라 속인 에밀리아는 옛 가족과 기묘한 동거를 시작한다. 마니타스의 아내 제시(설리나 고메즈)는 남편을 코앞에 두고도 에밀리아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한다.

'로렌스 애니웨이'(2013)나 '대니쉬 걸'(2016)처럼 트랜스젠더 남편을 포용하는 여자의 이야기가 나오려는가 싶던 순간 스토리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쭉쭉 나아간다.

몸이 변하면 생각도 변한다는 리타의 말이 맞는 것일까. 에밀리아는 제시가 다른 남자를 만나도 큰 관심이 없다. 마니타스였다면 아내의 "사지를 갈가리 찢어 개먹이로 줬을"테지만, 에밀리아는 마약 범죄에 연루돼 실종된 사람들을 찾는 일에 몰두한다. 비영리단체까지 설립한 그는 실종자의 유해를 발굴해 가족에게 돌려준다.

놀라운 점은 가스콘이 이른바 '유해한 남성성'이 극대화한 마니타스와 자애롭고 따뜻한 성녀 같은 에밀리아 두 캐릭터를 모두 소화했다는 점이다.

실제로도 트랜스젠더인 가스콘은 2018년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 수술을 받았다. 10대 때 만난 아내와의 사이에서 얻은 딸과 수술 이후에도 함께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지 확대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 속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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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타스가 의사에게 과거를 털어놓으며 수술 의지를 드러내고, 에밀리아가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아들 앞에서 숨죽여 우는 모습에서 가스콘이 경험했을 법한 감정이 엿보인다.

가스콘은 이 영화로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트랜스젠더로는 최초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데 이어 다음 달 열리는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같은 부문에서 첫 트랜스젠더 후보로 올라 있다.

리타 역의 샐다나 역시 섬세한 연기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가모라, '아바타'의 네이티리 역으로 유명한 그는 이번 영화에선 연기력뿐만 아니라 뛰어난 노래와 춤 실력도 보여준다. 특히 멕시코에 촉수처럼 뻗어 있는 부패한 인사들을 한 명씩 지목하며 비판하는 시퀀스가 압권이다. 골든글로브 여우조연상 트로피를 거머쥔 샐다나는 가장 강력한 오스카 수상 후보로 꼽힌다.

핑퐁처럼 튀는 스토리덕에 영화의 장르가 범죄물에서 스릴러, 로맨스를 오가는 점도 매력 중 하나다. 뮤지컬 넘버와 안무까지 더해지며 영화는 무지개처럼 다채로운 매력으로 빛난다.

그러나 영화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만만찮다. 개봉 직후 남미에선 멕시코를 범죄와 타락의 소굴로 묘사하고 대사가 어색한 스페인어로 이루어져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는 트랜스젠더의 타고난 남성성이 위협적으로 묘사된 점을 비판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가스콘이 과거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인종차별적인 글을 올린 사실까지 알려지며 논란의 중심에 섰다. 영화는 내달 열리는 아카데미상에서 13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3월 12일 개봉. 133분. 15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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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mbo@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5년02월27일 06시00분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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