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나는 아직도 작은 짐승이로다.인생은 항시 멀리구름 뒤로 숨고꿈결에도 아련한피와 고기 때문에나는 아직도괴로운 짐승이로다.(중략)어두운 무덤을 헤매는 망령인 듯가련한 거위와 같이언젠가 한번은들고 몰려오는 물결에 휩싸일나는 눈물을 배우는 짐승이로다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조지훈(1920∼1968)부산의 책방에서 열린 낭독회에서 한 독자에게 질문을 받았다. 바다를 보면 어떤 기분이 드는지? 받고 나니 그 질문 자체가 망망대해. 그때 이 시가 떠올랐다. 바다 앞에 서면 내가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 들어 겸손해진다고 답했지만, 꾀죄죄한 대답 대신 조지훈의 이 시를 읽어드렸다면 좋았을 것 같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나는 아직도 작은 짐승이로다”, 얼마나 근사한 대답인가. 아직 눈도 못 뜨고 귀도 열리지 않은 어린 짐승처럼 순하게 캄캄해진 기분이 든다고 답했더라면 좋았을 테다. 낭독회의 여운을 곱씹으며 광안리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바다 한가운데 펼쳐진 다리, 그 위를 크고 작은 자동차들이 흘러 다닌다. 다리 아래에는 누가 실수로 빛을 쏟은 듯 경이로운 윤슬! 이것이 빛더미구나. 빚더미 말고 빛더미! 멀리서 평생 빛의 움직임이나 좇으며 살았으면…. 그러다 “언젠가 한번은/손들고 몰려오는 물결에 휩싸일” 때를 만나면 파도보다 더 뒤척이며 울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끝과 시작을 알 수 없기에 바다 앞에 서면 마음이 놓인다. 우리가 평생 “눈물을 배우는 짐승”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바다 앞에서 배울 수 있으니 좋지 않은가. 박연준 시인©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좋아요 0개 슬퍼요 0개 화나요 0개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박연준의 토요일은 시가 좋아]〈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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