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선 별로 주목받지 못했지만 미국과 유럽 언론이 꽤 비중 있게 다룬 뉴스가 독일 총리의 지난달 기독민주당(CDU) 전당대회 발언이었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복지국가는 우리 경제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고 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정치인이 말할 수 없는 걸 말했다”고 논평했다. 서구 민주주의 국가에서 금기나 다름없는 불편한 진실을 용기 있게 짚었다는 것이다.
독일은 자타가 인정하는 재정 모범생이다. 지난해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은 63%로 영국(101%), 프랑스(113%), 이탈리아(135%) 등 다른 유럽 경제대국은 물론 미국(120%), 일본(236%)보다도 한참 낮다. 복지 확대 여력이 가장 큰 선진국이 바로 독일이다. 게다가 독일은 1949년부터 헌법에 복지국가 이념을 반영해왔다.
그런 독일에서 총리가 복지 개혁을 화두로 꺼낸 건 대내외 여건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첫째, 안보 환경의 변화다. 다른 서유럽 국가와 마찬가지로 독일도 2차대전 이후 안보를 미국에 의존했다. 그 덕분에 경제에 올인하면서 ‘라인강의 기적’을 일궜고, 복지도 늘릴 수 있었다.
독일의 지난해 사회복지 지출은 1조3500억유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GDP 대비 비중은 27.9%로 코로나19 때를 제외하면 역대 최고 수준이다. 재정중독에 빠졌다는 프랑스(30.6%)보다는 낮지만 ‘유럽의 병자’라는 이탈리아(27.6%)보다 높다. OECD 평균(21.2%)도 뛰어넘는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로 상황이 달라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독일을 비롯한 유럽 동맹국에 국방비를 GDP의 5%까지 늘리라고 압박했고 이 비중이 1.9%이던 독일도 이를 수용했다.
독일은 이를 위해 헌법을 바꿔 ‘부채 브레이크’마저 없앴다. 그동안 연간 재정적자를 GDP의 0.35%로 제한해왔는데, 국방비에는 이 한도를 적용하지 않기로 했다. 영국 프랑스 같은 핵보유국이 아니면서 러시아와 국경은 더 가까운 독일로선 재무장 속도를 높이는 게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이다.
둘째, 저성장의 늪이다. 독일 경제는 올해까지 3년 연속 역성장 위기다. 주력 산업의 경쟁력이 떨어지는데 혁신은 더딘 게 근본 원인이다. 탈원전으로 에너지 가격이 오르자 값싼 전기료를 찾아 독일을 떠나는 기업도 늘었다. 베이비붐 세대는 은퇴하는데 새로운 노동 인구는 그만큼 유입되지 않고 있다.
이대로면 5년 뒤엔 GDP 대비 복지 지출이 30%대로 높아지고 GDP 대비 국가부채는 70%를 넘을 전망이다. 장기적으로 국가채무비율이 100%를 넘을 것이란 경고도 나온다.
따지고 보면 독일뿐 아니라 유럽의 관대한 복지국가 모델은 전후 고속 성장과 미국 안보 우산의 결합이 만들어낸 독특한 산물일지 모른다. 복지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저성장과 안보 위기의 시대엔 유럽식 고부담·고복지 모델은 지속 가능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우리도 강 건너 불 보듯 할 일이 아니다. 한국도 저출생·고령화가 이어지는 가운데 저성장 기조가 굳어질 조짐이다. 안보 환경은 독일보다 심각하다. 경제 규모 대비 복지 비중은 15.3% 정도로 아직은 선진국 평균보다 낮지만 그동안 선심성 복지가 늘어난 탓에 이 비중이 높아지는 건 시간문제다.
게다가 재정엔 빨간불이 켜졌다. 기획재정부 전망을 보면 GDP 대비 국가부채는 올해 49%에서 2035년 71%, 2045년 97%, 2055년 126%, 2065년 156%로 기하급수적으로 뛴다. 어쩌면 이재명 대통령은 재정을 마음껏 쓸 수 있었던 마지막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될지 모른다. 그런데도 진보 정부와 보수 정부를 막론하고 복지 개혁은 뒷전이었다. 진보 진영에선 유럽식 복지국가 모델을 한국의 이상으로 여기는 경향마저 강하다.
한번 늘어난 복지를 줄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최근 프랑스가 여실히 보여줬다. 프랑스는 복지 개혁을 위해 긴축에 나섰다가 내각 붕괴와 신용등급 강등이란 굴욕을 맛봤다. 노동조합은 그래도 긴축은 싫다며 ‘국가 마비’ 시위까지 벌였다. 한국도 지금부터 지출 속도를 줄이지 않으면 언젠가 프랑스 꼴이 날 수 있다. 메르츠의 경고를 흘려듣지 말아야 할 이유다.

1 month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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