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3 게엄 때는 존 로크의 '삼권 분립' 과 토크빌의 '미국 민주주의' 를 공부했다. 공자와 맹자, 노자 등 동양 철학서를 읽으며 국가와 시민의 관계에 대한 고민도 나눴다. 고전 읽기 뿐만이 아니다. 모의 최저임금위원회를 열고 내년도 적정 최저임금을 논하는 등 최신 시사도 다룬다. 정치·경제적 자유, 저출생 고령사회, 인공지능(AI) 등 얘기 주제는 끝이 없다.
고서의 지혜를 빌려 오늘의 문제 해결능력을 기르는 20대들의 지식 공방 ‘아름다운 서당’의 모습이다.
이 곳의 총괄 책임을 4년째 맡고 있는 정병석 이사장은 24일 “그저 인문학을 가르치는 게 목표가 아니라 20대 청년들을 리더로 기르는 과정”이라고 소개했다. 그래서 아름다운서당의 영문명은 ‘영 리더스 아카데미’다. 20주에 걸쳐 매주 토요일마다 하루 종일 수업을 하고 마지막 5일은 합숙하며 집중캠프를 진행한다. 리더 양성을 목표로 한 만큼 토론과 발표 능력을 기르는 것을 우선시한다. 초빙 강사들 이론 강의는 10분 이내로만 짧게 한다. 질의응답과 토론, 발표로 하루를 채운다.
2005년 시작한 아름다운서당은 올해로 설립 20주년을 맞았다. 대우그룹 임원 출신으로 김우중 전 회장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를 기획했던 서재경 초대 이사장이 세운 공간이다. 수업료는 ‘0원’인데 읽어와야 할 고전 책까지 무료로 준다. 수업료 없이도 유지되는 데는 아름다운서당 운영진들과 수료생, 기업의 꾸준한 후원이 있다.
정 이사장과 운영진들이 십시일반 운영비를 내고, SK에너지 등 몇몇 기업들도 매년 소정액을 후원한다. 서울석유는 서울 장충동 본사 건물을 매주 토요일 무료로 빌려주고 점심도 제공한다. 정 이사장은 “이 과정을 수료하고 졸업한 대학생들이 취업해 후원하는 경우도 있다”며 “취직을 하고서도 스터디를 이어가고 후배들을 지원할 만큼 유대감도 남다르다”고 소개했다.
정 이사장은 서울대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1975년 행정고시 17회로 공직에 입문했다. 고용노동부 고용정책과장, 근로기준국장 등을 거쳐 노무현 정부 때 고용노동부 차관을 지냈다. 관료 시절 고용노동법을 최초로 법제화하는 데 기여했다. 퇴직 후 거액에 관료들을 ‘모셔 간다는’ 로펌이나 대형 노무법인 대신 학자의 길을 택했다.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젊은 인재들을 가르치는 게 더 가치있게 나이드는 길이라고 봤다”는 이유에서다. 한국기술교육대 총장을 거쳐 한양대에서 경제사, 경제성장론 등을 강의했다.
서 전 이사장 권유로 4년 전 바통을 이어받았다. 지식 나눔에 그치지 않은 감정적 유대도 함께 한다. “부모에게 우울증을 밝히지 못한 학생이 3~4시간씩 저녁에 상담을 하자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힘들다고 그만두려는 학생들을 동기부여 하느라 자정이 되어서야 집에간 적도 있지요. 지식을 나누며 정서적인 유대도 끈끈해집니다.”
다시 그에게 ‘왜 리더를 기르는데 인문학과 토론이 필요하냐’로 반문했다. AI가 고전의 내용을 다 요약해주는 시대 아니냐고. 정 이사장은 “AI시대는 지식과 기술의 축적만으로는 차별화된 경쟁력을 갖추기 어렵다”며 “지식이 넘칠수록 통찰력과 논리, 창의성이 필요한데 정반합, 변증법의 논리를 통해 진리를 탐구하는 훈련의 과정이 고전에 녹아있다”고 설명했다.
아름다운 서당은 오는 29일까지 20기 수강생을 받는다. 수도권 소재 4년제 대학 재·휴학생을 대상으로 한다. 지난해엔 35명이 응모해 28명이 면접을 통과하고 수강생으로 뽑혔다. 이 중 성실하게 끝까지 커리큘럼을 마쳐 수료증을 받아간 학생은 17명이다.
“수료한 대학생들이 후배들에게 추천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책을 읽는 과정이 힘들기 때문에 AI를 활용하자는 안도 있었지만 학생들 스스로가 반대하더군요. 고되더라도 여기서라도 AI 도움 없는 책 읽기를 하고 싶다는 게 학생들의 요구였습니다.”
박종필 기자 j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