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지난해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백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와 K컬처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주간으로 게재하며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 확대
본인 제공
필자는 지난 칼럼에 이어 보스턴 마라톤 도전기를 추가로 게재한다. 2024년과 2025년 연달아 대회에 참가한 필자가 보기에 보스턴마라톤은 엘리트 체육인은 물론 참가 자체로 명예를 얻는 아마추어 러너에게 꿈의 무대가 아닐 수 없다.
달리기의 한계에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서로를 만날 수 있는 순간의 날이다. 견우와 직녀의 오작교의 만남처럼 전설의 주인공이 된다. 그 영광스러운 세계적인 무대에 우리나라 선수들, 서윤복(1947), 함기용(1970), 이봉주(2001)가 우승했다. 이를 소재로 한 '보스턴 1947' 영화도 최근에 개봉한 바 있다.
보스턴마라톤 코스는 일직선으로 운영된다.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 전쟁의 승리 소식을 달려서 전한 '마라톤 태초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다.
참가자들이 대회 당일, 미리 짐을 정리한 후 가족, 지인과 작별 인사를 나누면, 노란 스쿨버스가 기다린다. 출발지인 홉킨턴 마을로 간다. 미래의 주인공인 어린이를 보호하기 위해 450마력의 2톤짜리 강철 합금으로 만들어진 미국의 노란 스쿨버스를 타보는 것도 마라토너에게는 특별한 경험이다.
한 시간이 넘는 42.195㎞ 고속도로를 주행하는 동안, 차 안에서 달리기 이야기로 웃음꽃이다. 톡톡 터지는 팝콘처럼 '스몰토크'로 차 안이 흥미진진하다.
보스턴마라톤의 배(가슴) 번호는, 올해 참가 기록 순서를 나타내고, 1천명씩 그룹을 나눠, 차례로 출발한다.
남녀 구분 없이, 나와 최근 기록이 같은 사람들과 처음부터 끝까지 나란히 달린다. 다른 참가자도 나와 마찬가지로 그런데도 참가했을 것이다. 삶의 틈을 쪼개어 다시 이곳에 왔다.
선두그룹인 'Wave 1'(Red) 그룹이 먼저 도착하고 이후로 'White', 'Yellow', 'Blue 순서'로 와야 한다. 홉킨턴 마을 홉킨턴 고등학교 마당(Athlete village)에 처음으로 도착하고, 그 안에서 출발 시각까지 기다려야 한다.
지난해에는 출발 전에 비가 와서 바닥이 젖었고, 운동화에 흙이 묻은 채로 좁은 피난 장소 같았다. 올해는 날씨가 좋아 야외의 모든 공간이 휴식처가 됐다. 날씨 덕분에 아무 곳이나 앉거나 누워 볕을 쬐며 출발 전의 순간을 즐긴다.
70억 인구 중, '서브 3'(풀코스를 3시간 안에 달리는 그룹)를 달성하는 사람은 일 년에 만 명 정도라고 한다. 그만큼 달성하기 어려운 수치를 가진 사람들의 차분한 여유가 좋아 보였다. 고요한 가운데 조금씩 움직이며 휴식을 취하는 그들의 모습은 신선이 따로 없었다. 나도 누워 느긋하게 하늘을 봤다.
세 시간 남짓 달리기 위해 13시간을 비행기를 타고 오다니 그 자체가 행운이다. 삶의 방향은 때론 신기하다, 마라톤을 마친 뒤 12시간이 되기 전에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와야 한다.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믿는다. 2박 3일의 미국 여정, 쌩하니 타고 가, 죽도록 달렸다. 여태까지 한 도전 중 가장 무모한 시간일지도 모른다.
보스턴마라톤은 '애국자의 날'에 열린다. 출발 전, 미국 국가가 울려 퍼지고 전투기 두 대가 음속을 가르며 하늘을 가른다. 긴장감이 고조된 그 순간, 총성과 함께 첫 그룹이 출발한다. 긴 내리막이 열리고, 러너들의 몸은 자연스럽게 앞으로 쏠린다. 남은 일은 단 하나, 결승선을 향해 달리는 것뿐이다.
코스는 내리막과 오르막이 반복되며 전략과 집중력을 요구한다. 초반 내리막은 오버페이스 유혹이 강한 구간. 하지만 응원의 밀도는 도심을 지나며 줄지 않는다. 사람들의 박수 소리와 함성은 보스턴의 날씨보다도 끈질기다.
15㎞ 지점, 호숫가의 고요 속에 러너들의 발소리만 들린다. 모두가 여유를 간직한 채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한다. 이 순간은 아주 짧지만, 그 의미는 길다. '이대로만 달릴 수 있다면'이라는 바람이 가슴을 치고 지나간다.
21㎞ 지점, 웨슬리 칼리지 앞 '스크림터널'에 이르면 상황은 급변한다. '키스해줘요' 팻말을 든 여대생들의 외침은 수백 미터 전부터 들려왔다. 오래전부터 자기 학교 앞을 지나는 보스턴마라톤 주자들에게 응원하는 전통이 있다. 대회 날 보스턴마라톤 주자들에게 키스를 받으면 행운이 온다는 소문 때문이다.
'나에게 키스해줘요' 등의 팻말을 들고 있는 수많은 여대생이 응원하며 소리 지르는 것이 300∼400m 전부터 들려 '스크림터널' 이라고 불린다. 보스턴칼리지 앞에서는 더 강렬한 응원이 러너들을 끌어당긴다. 보스턴마라톤의 응원은 하나의 문화다. 전통이 살아 숨 쉬는 유일무이한 스펙터클이다.
이미지 확대
본인 제공
하지만 이 대회의 진짜 얼굴은 후반부에 드러난다. 30㎞ 이후, 연달아 등장하는 언덕 구간은 모든 러너의 시험이다. 갑자기 멈춰 서게 되는 그 순간, 나는 깨닫는다. '지금까지 달릴 수 있었다는 것'이야말로 행운이었다고. 그리고 '완주'란 단어는 그 자체로 감사의 문장이다.
'너는 얼마나 큰 꿈을 꾸었니? 모든 게 뜻대로 된다면'이라는 질문은 그 자체로 도발이다.
이미지 확대
본인 제공
우리는 늘 통제할 수 있는 삶을 꿈꾸지만, 마라톤은 말해준다.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걸음뿐이라고. 그런데도 포기할 수 없다. 힘들어도 다시 보폭을 조절하고 나아간다.
보스턴마라톤의 혹독한 코스를 경험하고 나면 "다시는 안 와야지"라고 다짐하는 이들도 있다. 나 또한 '힘든 일은 싫다'는 인간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곳에선 도망치고 싶지 않다.
포기할 수 없는 마력, 다시 뛰고 싶은 욕망이 나를 일으킨다. 수십 번 멈춰 섰지만 수십 번 다시 달렸다. '다시 또, 다시!' 스스로 외치며 달렸다. 피니시 라인이 보였을 때, 나는 나 자신이 미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자랑스러웠다.
이미지 확대
본인 제공
마라톤은 내게 어떤 의미일까. 더 빠르게 보다 더 나아지기를 꿈꾸는가.
어제보다 더 나은 나로 살기 위해, 나는 다시 '달리는 나'를 보고 싶다. 출발해 결승선에 도달한 이들 모두는, 각자의 이유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 위대한 존재다.
유니콘은 실제로 있었다. 오늘, 내가 달렸던 그 길 위에 있었다.
김정욱 (크루 및 작가 활동명 : KIMWOLF)
▲ 보스턴 마라톤 등 다수 마라톤 대회 완주한 '서브-3' 마라토너, 100㎞ 트레일 러너. ▲ 서핑 및 요트. 프리다이빙 등 액티비티 전문 사진·영상 제작자. ▲ 내셔널 지오그래픽·드라이브 기아·한겨레21·주간조선·행복의 가득한 집 등 잡지의 '아웃도어·러닝' 분야 자유기고가.
<정리 : 이세영 기자>
seva@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5년05월30일 11시16분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