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전 세계를 뒤흔든 코로나19 팬데믹은 단순한 보건 위기를 넘어 사회·경제·정치 전반을 마비시키는 전방위적 재난이었다. 바이러스는 국경을 넘나들었고, 한 국가의 감염병 위기는 세계인의 위협으로 다가왔다.
각 나라가 국경을 봉쇄하고 의료 물자를 자국 중심으로 확보하는 시기를 겪으면서, 우리는 국제적 연대 없는 고립이 얼마나 취약한지 체감했다. 팬데믹 장기화 속에서 백신 개발과 분배, 정보 공유, 방역 전략 표준화 등 국제협력이 이뤄지고서야 위기 극복의 실마리가 보였다.
국제사회는 코로나19를 계기로 글로벌 보건 위기 극복을 위해 힘을 합쳤다. ACT-A(Access to COVID-19 Tools Accelerator)로 백신과 치료제의 공평한 접근을 촉진하며 저소득 국가에 대한 지원을 확대했고, '팬데믹 펀드'는 각국 감염병 위기 대비·대응 역량 강화의 재정적 기반을 마련했다. 감염병혁신연합(CEPI)은 미래 팬데믹 발생시 100일 내에 백신을 개발하겠다는 '100일 미션 이니셔티브'를 발족하는 등 국제사회가 공동대응 역량을 강화하고 있다.
◇제78차 세계보건총회, 국제보건 공조 이정표 세워
이러한 국제보건 외교 흐름 속에서 대한민국은 선도국가로서의 역할을 착실히 수행하고 있다. 필자는 지난달 19일부터 22일까지 나흘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78차 세계보건총회에 참석했다. 세계보건총회는 194개 세계보건기구(WHO) 회원국과 국제기구·보건 이니셔티브들이 참석해 세계인의 건강 증진을 위한 결의와 구체적 방안을 논의하는 가장 큰 연례 보건행사다.
필자는 제77차 총회 부의장으로서 개회 선언과 함께 미래 보건 위기에 보다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국제보건규칙 이행 강화 필요성을 강조했다. 8월 말 한국이 수검할 WHO 합동외부평가 계획도 국제사회에 공유했다. WHO 사무차장, 예방접종국장 등 WHO 주요 인사, CEPI와 국제의약품구매기구, 영국·캐나다·싱가포르 공중 보건기관 대표와 면담하며 다자적·양자적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WHO를 중심으로 세계는 국제보건 규범 정비에 힘쓰고 있다. 지난해 제77차 세계보건총회에서는 국제보건규칙을 개정해 '팬데믹' 정의를 담았다. 회원국의 국제보건규칙 이행 강화를 위해 당사국 위원회도 신설했다.
이번 세계보건총회는 미래 팬데믹 대응에 전기를 마련했다. 제78차 세계보건총회에서는 'WHO 팬데믹 협정'의 합의 문안이 채택됐다. 감염병 팬데믹 발생 시 회원국 간 공정하고 신속한 정보 공유, 백신·치료제 등 필수 대응 자원에 대한 접근 향상과 형평성 있는 분배 등을 포함한 공동대응 원칙과 책임을 명문화했다. 이는 국제보건 거버넌스의 역사적인 전환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세계적 연대와 신뢰에 기반한 보건 위기대응을 제도화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매우 크다.

◇글로벌 위기대응, 국제협력 중심에서 행동하는 한국
공중보건 위기대응 속도와 효율을 높이기 위한 글로벌 협력이 본격화된 지금, 한국은 단순 참여국을 넘어 신뢰받는 파트너이자 글로벌 보건 협력 '의제 설정자'로서 위상도 올라가고 있다.
첫째, 한국 위기대응 모델이 많은 국가의 표준이 되고 있다. 질병통제예방센터 기능을 담당할 국가 공중보건기관 신설이 팬데믹 이후 세계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등 걸프협력회의는 2022년 10월 걸프 CDC를 설립했고, 올해 4월 싱가포르 감염병청과 일본 보건안보청이 연이어 출범했다. 몽골도 국가 공중보건기관 신설을 준비 중이다. 이런 추세 속에서 지난 2020년 9월에 출범한 대한민국 질병관리청의 위기대응 모델을 벤치마킹하기 위한 각국 방문이 이어지고 있다.
둘째, 글로벌 보건안보 역량 강화를 위해 다자·국가 간 협력을 다각화하고 있다. 질병관리청은 2021년부터 활동 중이었던 WHO 항생제 내성 협력센터 외에도 지난해 'WHO 팬데믹 대비·대응 협력센터', 올해 'WHO 만성질환 조사 감시·빅데이터 활용 협력센터'로 각각 지정받았다.
2023년 12월에는 질병관리청 내에 글로벌 보건안보조정사무소(GHSCO)를 설치해 글로벌 전문가가 참여하는 콘퍼런스·워크숍 개최, 아세안 국가 등을 중심으로 한 맞춤형 교육훈련 프로그램 운영 등을 펼치고 있다. 라오스, 몽골 등 질병관리청이 양자 공적개발원조(ODA) 사업을 진행하는 국가와는 신종감염병합동 모의훈련 등으로 미래 보건 위기 대비 역량 강화를 돕고 있다.
셋째, 질병 관리 전문기관 간 전략적 양자 협력 확대다. 질병관리청은 미국, 유럽, 중국, 아프리카 CDC 등 주요국 공중보건기관과 양해각서(MOU)를 체결해 협력을 제도화했다. CEPI 등 국외 전문기관과도 업무협약, 주기적 기술 협력회의, 인력 교류 등으로 협력을 지속하고 있다.

이처럼 질병관리청이 보유한 전문성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글로벌 역량 강화를 위한 실질적인 협력과 지원을 확대하는 것은 감염병 공동대응에 대한 대한민국의 국제적 책무를 다하면서, 국제사회에서 보건 리더십을 높이고 보건안보를 강화하는 전략적 선택이 될 것이다.
이번 세계보건총회에서 미국 보건부 장관은 WHO 탈퇴 의사를 재확인하면서 더욱 효율적이고 정치적 영향력에서 자유로운 다자적 협력 체계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후속 조치로 WHO는 예산 절감과 조직 효율성 강화를 위해 조직 구조조정을 추진하고 있다.
WHO 조직 효율화 과정에서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국제적 도움을 필요로 하는 국가에 대한 지원은 최대한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WHO 본부와 6개 지역 사무소 조직 축소가 불가피하지만, 국가 사무소 조직 축소 최소화 원칙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필자가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WHO 독립감시자문위원회 활동으로 참여한 국가 방문에서도 WHO 국가사무소 역할은 오히려 더 강화해야 한다는 점은 이미 확인했다. 위기처럼 보이는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인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글로벌 협력의 중요성은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대한민국 질병관리청은 변화하는 국제보건 질서 속에서 '국민 건강 지킴이' 역할을 충실히 하고, 글로벌 보건안보를 지키기 위한 역할과 책임을 다해 세계인의 존경을 받는 기관으로 거듭나겠다.

지영미 질병관리청장 jeey6202@korea.kr
〈필자〉서울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영국 런던대에서 의학미생물학 석사와 바이러스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수십년간 국내·외 보건의료 관련기관에서 국제적 감염병 전문가로 활약했다. 2007년부터 2014년까지 WHO 서태평양지역본부 지역조정관을 지냈다. 2014년부터 2020년 기간 중 국립보건연구원 감염병연구센터장, 국제백신연구소(IVI) 이사, WHO 예방접종전략자문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2021년부터 2022년까지 한국파스퇴르연구소 소장을 역임했으며, 이후 2022년 12월 제3대 질병관리청장으로 취임했다. 2020년부터 2023년까지 WHO 코로나19 긴급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