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텀블러 하나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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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에세이] 텀블러 하나의 가치

“올여름이 제일 시원하대.”

누군가의 농담에 웃으면서도 마음 한쪽이 씁쓸해졌다. 매년 더워지는 여름, 점점 짧아지는 봄과 가을을 보면 더 이상 웃을 일만은 아니다. 기후 위기는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그래서 탄소중립이라는 말도 이제는 낯설지 않다.

스웨덴에는 ‘플로깅(plogging)’이라는 운동이 있다. 달리면서 쓰레기를 줍는 활동이다. 건강도 챙기고 환경도 지킬 수 있어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유행하고 있다. 퇴근길에 플로깅을 하는 직장인, 주말마다 가족과 동네를 돌며 쓰레기를 줍는 이웃까지. 환경을 지키는 일은 이제 특별한 사람의 몫이 아니다. 누구나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일이 된 것이다.

내가 일하는 관악구청에도 작은 변화가 이어지고 있다. 2023년부터 청사에 일회용품을 들고 들어올 수 없게 되면서 회의실 생수병도 다회용기로 바꿨다. 층마다 텀블러 세척기가 생겼고 구내 카페에서는 다회용 컵을 쓴다. 행사 때도 다회용기를 대여하는 모습이 익숙하다. 몇 해 전만 해도 점심시간이면 분리수거함 위에 반쯤 남은 음료컵이 쌓였고 엘리베이터 앞엔 테이크아웃 잔을 든 직원들이 줄을 서 있었다. 지금은 대부분 텀블러를 들고 다닌다. 어쩌다 일회용 잔을 든 직원이 나와 마주치면 등 뒤로 감추며 민망한 웃음을 짓는다. 이런 광경을 보면 구청의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걸 실감한다. 제도가 자리 잡고 직원들의 습관이 바뀐 것이다. 한 환경단체 조사에 따르면 관악구청의 일회용 컵 반입률은 서울 자치구 중 가장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지역 주민들의 참여도 활발하다. 시장에 가면 장바구니를 든 어르신을 볼 수 있고 행정복지센터에는 아이 손을 잡고 페트병을 모아오는 가족이 많아졌다. 동네마다 환경 동아리가 생기고 장바구니 캠페인도 열린다. 얼마 전 청년들과 천연 수세미를 만드는 자리에 함께했는데, 놀랍게도 이미 집에서 천연 수세미를 쓰는 청년이 적지 않았다. 기후 위기에 맞서는 ‘기후 시민’이 늘어나는 모습이 무척 고무적이었다.

국제사회는 2050년 탄소중립을 목표로 유엔의 지속가능발전목표(UN SDGs)와 파리협정 등을 중심으로 에너지 전환과 감축을 위해 노력 중이다. 우리나라도 2030년까지 2018년 대비 온실가스 40% 감축을 약속하고 동참하고 있다. 관악구 역시 도시공원, 제로에너지 빌딩 등 탄소중립 도시 조성에 힘쓰고 있다.

변화를 완성하는 힘은 일상에 있다. 도시를 바꾸는 일은 제도만으로 되지 않는다. 도시공원 같은 큰 정책이 방향을 잡는다면 그 길을 걷게 하는 힘은 주민 손에 들린 텀블러 하나, 장바구니 하나에서 나온다.

누군가는 의문을 가질지 모른다. ‘내가 줄인 일회용 컵 하나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그런 작은 실천이 모일 때 좋은 변화가 시작된다. 지속 가능한 도시는 내일의 약속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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