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시간이 만드는 깊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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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에세이] 시간이 만드는 깊이

차를 마실 때마다 시간이 빚어내는 맛을 생각하게 된다. 빨리 마시고 싶다고 찻잎을 잠깐만 담갔다 빼면 향이 충분히 우러나지 않고 맛도 어딘가 부족하다. 식물을 키우는 일도 비슷하다. 물을 많이 준다고 더 빨리 자라는 것도 아니고, 매일 들여다본다고 새잎이 바로 돋는 것도 아니다. 필요한 환경을 맞춰주고 기다리는 시간이 쌓여야 어느 날 조용히 변화를 보여준다.

사람 사이의 신뢰도 그렇게 쌓인다. 처음 만난 사람과 곧바로 깊은 관계가 형성되기 어렵듯, 좋은 관계는 작은 약속을 지키고 서로의 시간을 존중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깊어진다. 삶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하루아침에 달라지기보다 같은 방향을 꾸준히 바라보는 시간이 쌓였을 때 비로소 자신의 일부가 된다.

업무 현장에서 이런 순간을 자주 마주한다. 요즘은 새로운 기술이 빠르게 등장하고, 이를 활용해 더 빠르게 결과를 내는 일이 중요해지고 있다. 하지만 실제 성과가 자리 잡기까지는 기술의 속도와 별개로 여러 차례 검증과 조정을 거쳐야 한다. 조직 내 변화가 완전히 뿌리내리기까지 적잖은 시간이 든다. 내 직장인 지멘스 디지털인더스트리소프트웨어(DISW) 한국지사에서도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기 위해 오랜 시간 공들여왔다.

지난 7년간 전 직원과 함께한 ‘학습의 시간’이 대표적이다. 매주 월요일 아침마다 모든 직원이 모여 고객의 과제를 분석하고 가치 기반의 접근법을 공부했다. 일부 직원에겐 바쁜 업무 속 또 하나의 과제처럼 느껴졌을 수 있다. 그러나 7년이라는 세월이 쌓이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단순히 소프트웨어를 판매하는 기술 영업을 넘어 고객의 비즈니스 맥락을 이해하고 가치를 제안하는 역량이 조직 전반에 갖춰진 것이다. 매주 이어진 작은 학습이 조직의 유전자(DNA)를 바꿨다.

산업에서도 축적의 힘은 중요하다. 파트너사와의 관계는 한 번의 프로젝트나 계약으로 완성되기보다 함께 해결한 과제와 약속을 지켜온 경험 속에서 단단해진다. 지멘스가 HD현대 등 주요 그룹사와 함께 진행한 ‘설계와 생산을 잇는 차세대 디지털 플랫폼 구축 사업’도 4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초기 설계부터 시스템 검증, 각 그룹사의 생산 환경에 맞춘 플랫폼 최적화까지 모든 순간이 도전의 연속이었다.

기술적 난제를 함께 해결하고 조율하며 보낸 4년여의 시간은 단순한 시스템 구축 기간이 아니라 양사 간 신뢰를 제조 현장에 이식하는 과정이었다. 그 축적의 시간을 지나온 지금 현장에서는 디지털 트윈 기반 공정 최적화와 글로벌 협업 효율 극대화라는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 단기적인 속도전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결과다.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시대일수록 속도를 내야 할 일과 충분히 시간을 들여야 할 일을 구분하는 게 중요하다. 오랜 후에 남는 변화는 그 균형을 아는 데서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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