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하반기 퇴직연금 가입자 2만2000명은 갑작스러운 정부 정책 변화로 ‘날벼락’을 맞았다. 정부가 2009년부터 10년 넘게 허용한 총 1조3000억원 규모의 ‘증권사 퇴직연금랩’ 판매를 전격 중단하면서 가입자들이 1년 내 기존 상품을 해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퇴직연금랩은 증권사가 퇴직연금 적립금을 대신 굴려주는 상품이다. 주식·채권 등 국내외 펀드를 골라 시장 상황과 투자성향에 맞게 자산을 배분하고, 수시로 저성과 펀드를 교체하며 수익률도 관리해줬다.
고용노동부는 2008년 이런 ‘투자일임 유형’도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상 ‘투자 가능 상품’이라는 유권해석을 내렸지만 2021년 이를 철회했다. 이유는 명확히 공개되지 않았는데 은행·보험사 등 경쟁 사업자 반발, 국회의 문제 제기 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의원이 투자일임 상품의 근거를 명확히 하는 입법을 추진했지만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고, 퇴직연금랩은 결국 시장에서 사라졌다. 판매 중단 당시 퇴직연금랩(주식 비중 40%)은 연평균 7~8%, 누적 수익률 105%를 거두고 있었다.
잊고 있던 이 일화가 떠오른 것은 지난달 하순 고용부와 금융감독원이 내놓은 ‘2025년 우리나라 퇴직연금 투자 백서’ 때문이었다. 백서에 담긴 확정기여형(DC)·개인형퇴직연금(IRP)의 수익률 상하위 10% 간 극심한 격차를 보면서 퇴직연금랩 같은 일임형 서비스의 필요성이 새삼 느껴졌다. 지난해 코스피지수가 76% 오르면서 실적배당형 상품 중심으로 적극 운용한 상위 10%는 19.5% 수익률을 거뒀지만 원리금보장 상품으로 운용한 하위 10%는 겨우 0.5% 수익률을 냈다. 지난해 퇴직연금 전체 수익률은 6.47%로 역대 최고였지만 상위 10% 그룹이 끌어올린 결과이고, 가입자 절반은 2%대의 낮은 수익률에 머물렀다.
퇴직연금랩은 사실 이런 저성과 가입자를 지원하기 위한 상품이었다. 퇴직연금랩이 사라지면서 국내 DC·IRP 퇴직연금 수익률은 가입자 개인 운용의 결과가 됐다. 같은 퇴직연금이더라도 금융지식과 투자 경험, 위험성향에 따라 수익률 격차가 커질 수밖에 없다. IRP의 로보어드바이저 상품에 일부 예외가 인정된 경우를 제외하면 금융지식이 부족하거나 시장을 분석할 시간이 없는 가입자에게 증시 급등은 그림의 떡일 뿐이다.
2023년부터 시행된 디폴트옵션 제도라도 제대로 작동했다면 보완책이 될 수 있었다. 미국 호주 등 연금 선진국은 가입자가 별도 운용 지시를 하지 않으면 곧바로 단수의 실적배당형 상품에 자동 가입되도록 하는 디폴트옵션을 2000년대 중반부터 시행해 연 8~9% 수익률을 거뒀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가 예견했듯 한국은 부실한 제도 설계로 별 성과를 내지 못했다. 지난해 디폴트옵션 가입액은 53조원에 달했지만 수익률은 3.7%에 그쳤다. 원금보장형까지 포함해 5~6개 상품 중 하나를 가입자가 미리 지정해야만 디폴트옵션이 작동하도록 한 탓이다. 아직도 디폴트옵션 적립금의 85%는 원금보장형에 갇혀 있다.
정부도 이런 문제점을 인식하고 이번 백서를 통해 다방면으로 제도 개선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문제는 성과를 낼 수 있느냐다. 디폴트옵션은 주기적 평가를 통해 성과가 미진한 상품에 불이익을 줘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방침이지만 원리금 상품을 제외하는 등 근본적 개편 없이 실질적 효과가 나타날지는 의문이다.
정부는 현행 계약형 제도 외에 전문기관인 수탁법인이 퇴직연금 관리·운용을 담당하는 기금형 제도를 연내 도입해 내년 말부터 가동한다는 계획이다. 직접 운용이 어려운 가입자가 전문가 도움을 받을 길이 제도적으로 열린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론 부족하다. 전문가 운용의 길을 새로 만들겠다면 현 계약형 제도 안에서도 그 길을 막아둘 이유가 없다. 과거 퇴직연금랩 같은 금융회사 일임형 서비스를 대폭 허용해야 한다. 전문가에게 맡긴다는 본질이 같은데 기금형은 허용하고 계약형은 막는 건 제도적 모순이다.
퇴직연금 가입자에게 필요한 건 특정 제도에 갇힌 선택지가 아니다. 기금형과 일임형이 경쟁하도록 하고, 근로자가 성향과 필요에 맞게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퇴직연금 가입자의 수익률 격차를 줄이고 전체 수익률을 끌어올리는 현실적 해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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