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AI 협력 앞당길 경주 APEC

경북 경주 시내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행사로 글로벌 축제를 방불케 하고 있다. 이번 APEC 회의는 팬데믹 이후 한국이 주최하는 최대 규모 경제 협력의 장이자 정상 외교 무대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 정상들이 모여 무역·투자 등 역내 경제협력은 물론 인공지능(AI), 인구구조 변화 등 새로운 시대적 과제를 함께 논의한다.

그중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의제는 ‘AI 협력’이다. 2005년 부산 APEC 회의 준비 과정에 관여한 필자로선 20년 전 정상회의에선 단 한마디도 거론되지 않은 AI가 핵심 주제로 떠오른 것이 인상 깊게 느껴진다. 이제 AI는 산업 현장은 물론 우리 삶의 구석구석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제조, 의료, 금융, 물류 등 산업 생태계 전반을 넘어서 보고서 작성이나 예술 창작 영역에서도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실제로 세계 AI 시장은 2032년까지 2조4000억달러 규모로 성장할 전망이다. 바야흐로 AI 경쟁력이 국가 경쟁력의 척도가 되는 시대다.

이번 APEC이 ‘AI 협력을 통한 포용적 성장’을 핵심 의제로 내세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술의 격차가 경제적 격차로 이어지지 않도록 각국이 AI 관련 기술·데이터·윤리 기준을 공유하고 신뢰 기반의 디지털 협력을 강화해 나가자는 것이다. AI 분야에서 경쟁을 넘어 협력의 틀을 만드는 것은 그동안 자유무역과 혁신을 통해 공동 번영을 추구해 온 APEC의 정신과도 맞닿아 있다.

개최국 한국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다. 반도체, 통신 인프라, 정보통신기술(ICT) 등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갖춘 우리는 국제사회에서 AI 협력 논의를 주도할 만한 충분한 역량 보유하고 있다. 생산성 둔화, 고령화, 기후 위기 등 구조적 문제에 대해 AI를 통한 현실적 해법을 제시할 때다. 나아가 AI 혁신의 혜택이 고르게 돌아가도록 방향성과 원칙 등 새로운 글로벌 규범을 수립하는 과정에서도 한국이 주도적인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내적으로는 AI를 규제보다 육성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기업이 혁신의 중심이 되는 ‘한국형 AI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이런 인식하에 한국경제인협회는 올해 초 ‘AI 혁신위원회’를 출범했고, 최근 ‘K-AI 대도약을 위한 23대 정책 과제’를 제시했다. 핵심은 민간이 주도하고 정부가 제도적 기반과 인프라를 지원하는 ‘민관 팀워크’다. AI 데이터센터와 클러스터 구축, 그래픽처리장치(GPU) 공동구매, 전력·냉각 인프라 고도화, 산업별 데이터 개방, 그리고 인재 양성 및 규제 혁신이 그 중심이다.

장기적 저성장에 직면한 우리 경제에 AI는 새로운 반전의 기회다. 이틀 전 개막한 APEC CEO 서밋에서도 AI산업을 선도하는 국내외 기업인 간 교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민간의 혁신을 바탕으로 성장의 불씨를 되살릴 때다. 경주 APEC이 그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