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황인찬]이시바가 후대 총리에게 남긴 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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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 도쿄 특파원

황인찬 도쿄 특파원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일본 총리가 10일 ‘전후 80년에 대한 소감’을 발표했다.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총리가 1995년 전후 50주년을 맞아 총리 담화를 발표한 뒤 일본 총리는 10년 간격으로 8월 15일 패전일을 전후해 담화를 냈다. 이번에는 이전보다 두 달 늦은, 그것도 각의(국무회의) 결정이 아닌 개인 메시지 형식으로 나왔다.

“국가의 진로 그르친 역사 반복 안 돼”

시기가 늦고, 격이 낮아진 건 집권 자민당 내 보수파의 반발 때문이다. 이들은 2015년 ‘아베 담화’로 역사 문제는 마무리됐고, 추가 담화나 메시지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연이은 선거 패배로 지난달 사임을 표명한 이시바 총리의 입지는 한층 좁아진 상황이다. 하지만 그는 소신을 굽히지 않고 총리 재임 중에 메시지를 냈다. 분량도 A4 용지 7장으로 1, 2장이었던 이전 담화보다 길다. 그는 스무 번 원고를 퇴고했다고 한다.

어려운 과정을 거쳐 나온 메시지이지만 아쉬움도 남는다. 한국과 중국 등 이웃 나라와 관련된 과거사에 대해 “역대 내각의 역사 인식을 계승한다”고만 언급했기 때문이다. 이시바 총리는 앞서 올해 8월 15일 패전일 추도사에선 현직 총리로서 13년 만에 ‘반성’을 언급했다. 하지만 총리로서는 사실상 고별 메시지인 이번 발표에선 ‘사죄’나 ‘반성’과 같은 표현을 넣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일본이 당시 전쟁을 왜 피하지 못했나”에 대한 역사적 성찰에 집중했다. 정부와 수뇌부가 패배가 필연적인 것을 인식하면서도 무모한 전쟁에 돌입한 이유를, 전후 80년을 맞은 지금 일본 국민과 함께 생각해 보자는 취지였다.

이시바 총리는 전쟁 발발의 ‘반성’과 ‘교훈’을 조목조목 짚었다. 당시 헌법에 군의 통수권은 독립적인 것으로 여겨져 ‘문민통제(文民統制)’의 원칙이 제도상 없었고, 정부와 의회가 점차 군의 요구에 굴복하며 통제력을 잃게 됐다고 지적했다. 이런 과정에서 언론 또한 내셔널리즘을 키우는 데 치중했고, 전쟁 지지 논조만이 전해진 것도 문제였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그는 “냉정하고 합리적인 판단이 아닌, 정신적·감정적인 판단이 중시돼 국가의 진로를 그르친 역사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또 “전후 가장 엄중하고 복잡한 안보 환경 속에 놓여 있는 지금이야말로 역사에서 배우는 중요성을 재인식해야 한다”고 했다. 80년 전과 달리 지금은 문민통제의 민주주의가 확립됐지만 “민주주의는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취약한 것”이며 “정치인이 판단을 그르쳐 전쟁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는 무게감 있는 경고도 남겼다.

90주년, 100주년 日 총리 담화 기대

한 국가의 지도자가 전후 80년이 지나, 과거 전쟁의 발발 원인과 그것이 남긴 교훈을 일일이 되새긴 건 드문 사례일 것이다. 그만큼 과거 지도자의 과오가 컸으며, 후대 지도자는 역사를 직시해 다시는 잘못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간곡한 염원이 이번 소감에 담겼다. 이시바 총리를 이어 차기 총리로 거론되는 다카이치 사나에 자민당 총재를 비롯한 일본 정계의 총리 후보군은 이런 고언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으면 한다. 이시바 총리의 이번 성명은 또한 전후 10주년 주기로 현직 총리가 2차 세계대전 패전에 대한 입장을 발표해 왔던 관례를 이어갔다는 점에서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 특히 올해는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이기도 하다. 전쟁을 경험한 세대가 점차 세상을 떠날수록 경계심은 적어지고, 과거를 직시하려는 노력은 희미해질 수 있다.

그렇기에 전후 90주년, 100주년에도 일본 총리의 담화가 이어지길 기대한다. 그런 담화는 일본이 무모한 전쟁을 되풀이하는 것을 스스로 경계하고, 주변국과 미래의 발전 및 평화를 논의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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