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칼럼] 특별한 생과 사를 기억하는 법

1 month ago 13

[토요칼럼] 특별한 생과 사를 기억하는 법

“소중한 아기가 지금 우리 병원에서 탄생했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지난 12일 오전 10시 고려대구로병원에선 잔잔한 음악과 함께 축하 방송이 울려 퍼졌다. 병원에서 막 태어난 새 생명을 다 함께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자는 취지다.

중증 환자가 찾는 대학병원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장소다. 암이나 희소 질환으로 희망을 잃고 여명만 가늠하는 환자도 이곳에서 생활한다. 환자 심장이 멈춰 급히 심폐소생술에 나설 의료진을 찾는 ‘코드블루’가 수시로 울린다. 대학병원을 전쟁터에 비유하는 이유다.

삭막하던 병원에 축하 방송이 시작된 것은 2022년 3월이다. 새 생명의 탄생을 축복하는 메시지는 이 병원 산부인과 오민정 교수와 조금준 교수가 직접 녹음했다. 방송이 여의치 않은 평일 저녁과 주말, 공휴일을 제외하고 아기가 태어날 때면 어김없이 이들의 목소리를 병원 곳곳에서 들을 수 있다. 출산이 많은 날엔 종일 예닐곱 번 반가운 소식을 전하기도 한다. 지난해에만 이 병원에서 이런 축하 메시지가 500여 차례 울려 퍼졌다.

[토요칼럼] 특별한 생과 사를 기억하는 법

비교적 잦은 방송이지만 불만을 표하는 사람은 없다.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기다리던 환자들은 오히려 감사 인사를 전한다고 한다. 아픈 몸 탓에 잔뜩 긴장한 상태인데 같은 공간 어디선가 새 생명이 시작됐다는 것을 들으면 잠시나마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는 이유에서다. 작고 여린 탄생을 기억하는 병원의 배려가 누군가에겐 희망이 된 것이다.

새 생명의 탄생뿐 아니다. 의미 있는 죽음을 기억하는 병원도 있다. 서울대병원은 2023년 8월 국내 의료기관 중 처음으로 ‘울림길’을 만들었다. 장기 기증 후 뇌사 판정을 받고 생을 마무리한 환자를 병원 직원들이 배웅하는 절차다. 지금까지 이 병원에선 네 명의 영웅이 이 길을 통과해 누군가에게 장기를 내어 주고 세상을 떠났다. 미국 유럽 등에선 20여 년 전부터 ‘영예로운 배웅’(아너 워크)이 병원 문화로 자리 잡았다. 울림길은 이를 한국에 이식한 첫 시도다.

마지막 울림길은 지난해 12월이었다. 주인공은 악성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난 60대 기증자다. 그를 살리기 위해 애썼던 의사와 간호사 등 직원 수십 명은 중환자실부터 수술실까지 이어진 울림길에 모여 마지막 안녕을 고했다. 도열한 이들은 한마음으로 고귀한 희생에 경의를 표했다. 남은 가족에겐 위로 인사를 전했다. 세상과 작별한 영웅의 두 신장과 간, 폐는 각각 다른 환자에게 이식됐다. 죽음의 문턱 앞에 서 있던 또 다른 환자들에게 새 삶을 선물하고 떠난 것이다.

이들 두 병원의 출산 축하 방송과 울림길은 모두 ‘특별한 것’을 기억하기 위해 마련됐다. 지난해 기준 국내 합계 출생률은 0.75명. 1년 전보다 소폭 반등했지만 여전히 인구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 기준(2.1명)엔 턱없이 부족하다. ‘초저출생 국가’란 불명예는 한국을 수식하는 또 하나의 꼬리표가 됐다. ‘인구 소멸 1호 국가가 될 것’이란 경고도 낯설지 않은 소재가 된 지 오래다. 늦은 사회 진출 등으로 결혼 연령이 높아지면서 고령 임신도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다. 아이 울음소리가 사라지는 시대, 어렵게 얻은 새 생명을 낳는 출산은 그 어느 때보다 귀한 일이 됐다.

뇌사자의 장기 기증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인구 100만 명당 뇌사 기증자가 7.8명으로 세계 최하위다. 장기 기증에 대한 편견과 두려움 탓에 미국(50명)과 스페인(48명) 등 서구권 국가의 6분의 1 수준에 그치고 있다. 생명을 나누는 실천이지만 그 수가 턱없이 부족해 장기 기증을 기다리다가 매일 8명이 세상을 떠난다. 저출생과 급격한 고령화는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있다. 뇌사 기증자는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지만 중증 고령 환자는 꾸준히 늘고 있어서다. 특별한 생과 사를 알리는 병원들의 노력이 반가운 이유다.

이들에게 해법을 물었다. 매일 분만실에서 아이의 첫울음을 돕는 한 의사는 임신과 출산의 밝은 면을 더 많이 비추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했다. 아이가 주는 행복은 물론 생명이 탄생하는 의료 현장의 보람도 더 많이 전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울림길에 서서 고귀한 희생의 마지막을 함께 한 또 다른 의사는 장기 기증자에 대한 존경이 사회 전체로 퍼지길 바란다고 했다. 기증자 추모공원이나 추모의 숲 등을 통해 이들을 예우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귀한 탄생’과 ‘드문 죽음’이 더 이상 특별하지 않은 세상을 만드는 것은 모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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