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식민 지배 첫 사죄한 ‘무라야먀 담화’
과거사 미화 광풍 속 ‘기적’처럼 결실
30년간 집요하게 ‘담화’ 공격한 다카이치,
역사의 불길한 伏線, 한일관계 먹구름 예고
17일 별세한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일본 총리에게 항상 따라붙는 수식어다. ‘국회에서 돌을 던지면 세습 의원이 맞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금수저’ 의원들의 천국인 일본 정계에서, 무라야마 전 총리는 완전한 이방인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보기 드문 ‘흙수저’ 출신이었다. 소년 시절에는 종업원이 3명뿐인 작은 ‘동네 공장’에서 선반공으로 일하며 야간 상업학교를 다녔다. 70세의 나이로 총리가 됐을 때도 변변한 재산이라곤 지은 지 80년이 넘어 곧 무너질 것 같은 낡은 집 한 채가 전부였다. 총리 재임 시절에는 민박집으로 휴가를 가겠다고 해 보좌관들이 여기저기 수소문했지만, 하나같이 “총리가 민박을? 장난하지 마세요”라며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설날의 푸른 하늘을 보고 결심했다.” 한마디를 남기고 취임 1년 반 만에 표표히 총리직을 던지고 떠나버린 ‘선인(仙人)’의 풍모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그간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에게 그의 이름이 익숙한 것은 ‘무라야마 담화’를 통해서다.
“(일본은)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 특히 아시아 여러 나라의 많은 분들에게 큰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 … 다시 한 번 통절(痛切)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밝힙니다.”일본의 현직 총리가 처음으로 공식 담화를 통해 내놓은 반성과 사죄였다. 후임 총리 중 어느 누구에게서도 이렇게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사과는 없었다.
일본사회당 소속이었던 그는 ‘여당=자민당, 제1야당=일본사회당’이 공식처럼 통용되던 ‘55년 체제’가 깨지고 자민당과 사회당 간의 연립정권이 성립하면서 어느 날 갑자기 등 떠밀리듯 총리 자리에 올랐다. 의석수에서 자민당에 밀리고 사회당 안에서도 비주류였으며, 흔한 각료 경험 한번 없었던 그는 ‘실세 총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가 총리로 재임하던 시기는 일본의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을 자학(自虐)이라고 주장하며 과거사를 미화하고 덧칠하려는 ‘역사수정주의’ 광풍이 휘몰아치던 시절이다. 무라야마 담화는 ‘일본이 아시아의 일원이 되려면 철저한 반성과 진심 어린 사죄가 필요하다’는 그의 확고한 신념과 ‘꼭 관철시키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가 없었다면, 결코 나올 수 없었던 일종의 ‘정치적 기적’이었다. 취임 직후부터 시작된 무라야마 전 총리의 ‘반성과 사죄 행보’에 대한 자민당 강경파와 다른 우파 정당 의원들의 비판과 반발은 거세고도 끈질겼다.1994년 10월 중의원 본회의 대정부 질의도 상징적인 장면 중 하나다. 당시 2년 차 초선인 33세의 한 여성 의원이 무라야마 총리를 향해 일문일답식으로 집요하게 질문을 퍼붓는다. “지금 총리가 50년 전 정권의 결정을 잘못이라고 결정할 권리가 있습니까.” “잘못이라는 근거가 뭡니까.” “충분한 국민적인 협의도 없이 총리가 멋대로 일본을 대표해서 사과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여성 의원은 이후로도 무라야마 담화에 대한 공격을 자신의 ‘정치적 트레이드마크’ 중 하나로 삼았다. 3선 의원이던 2002년에는 “구체성이 결여돼 있다. 정밀히 조사해서 수정해야 한다”고 날을 세웠고, 자민당 정무조사회장(한국의 정책위의장에 해당)이던 2013년에는 “침략이라는 문구를 넣은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비난했다.
이 여성 의원이 바로 이달 초 자민당 신임 총재로 선출된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우익 성향의 제2야당인 일본유신회와 자민당 간의 연립정부 구성 협상이 거의 성사 단계라고 한다. 무라야마 전 총리의 별세 시점을 전후해 다카이치의 ‘총리 등극’이 급물살을 타는 것은 역사의 단순한 우연인가, 아니면 불길한 복선(伏線)인가.
다카이치는 2019년 자민당 총재 선거 출마 당시 ‘자녀 세대와 손자 세대까지 사죄를 시켜서는 안 된다’는 아베 담화의 한 구절을 콕 집어 거론하며 “나는 계승한다”고 했다. 무라야마 전 총리가 떠난 빈자리가 앞으로 점점 더 크게 느껴질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은 괜한 걱정일까.
무라야마 담화는 공자의 ‘장막여신(杖莫如信)’을 인용해 이렇게 끝맺는다. ‘기대고 의지할 지팡이로 삼기에 신의(信義)만 한 것은 없다.’ 퇴임 후에도 “담화의 정신을 잃지 말라”며 우경화하는 일본 정치를 향해 죽비를 날리던 무라야마 전 총리는, 우리에게 ‘신의를 보여주고 실천한 일본의 지도자’로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무라야마 전 총리의 명복을 진심으로 기원한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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