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사주 소각, 집중투표제 의무화…
여당의 ‘더 독한 상법’ 끝없는 질주
투기자본에 한국기업 먹잇감으로 던지면
삼성, 현대차, SK 자리 中기업 차지 될 것
풍전등화 같은 상황에서 SK가 꺼내 든 방패는 ‘자사주 매각’이었다. 원래 자사주에는 의결권이 없지만 다른 곳에 팔면 의결권이 살아난다는 점을 활용한 것. 국내 은행 등이 백기사로 나서 SK㈜ 자사주 10.41%를 사주면서 소버린의 ‘경영권 탈취극’은 실패로 막을 내렸다. 그렇다고 해서 소버린의 전적인 패배는 아니었다. 소버린은 2년여 만에 시세차익 등으로 9000억 원가량을 챙긴 뒤 ‘먹튀’ 했다.
미국 일본 등 대부분의 선진국은 차등의결권이나 포이즌 필 같은 경영권 방어수단을 다양하게 인정한다. 하지만 한국은 예나 지금이나 일절 허용하지 않는다. 만약 자사주 매각조차 불가능했다면 SK그룹이 지금 소버린 지배 아래 있지 말란 법이 없다. 헤지펀드의 속성상 하이닉스 인수처럼 위험한 결정은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고, SK그룹은 지금 우리가 보는 SK와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자사주는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놓고 벌어진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과 삼성그룹 간의 공방에서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두 진영 간 의결권 확보전이 치열한 가운데 삼성물산이 KCC에 자사주 5.76%를 매각한 ‘한 수’가 기세를 갈랐다. 엘리엇은 이를 법정으로 들고 갔지만 법원은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3일 상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로 기업들의 충격이 크다. 투자고 뭐고 소송 걱정에 밤을 새워야 할 참이다. 그러나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내친김에 자사주를 경영권 방어에 쓸 수 없게 ‘소각’을 의무화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민주당의 코스피5000특별위원회 소속 김남근 의원은 자사주를 취득 1년 이내에 소각하도록 하는 법안까지 다른 의원 24명과 함께 발의한 상태다. 자사주 매각을 빼고는 경영권 방어 수단이 전무한 상황에서 투기자본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자사주 비중을 높여온 기업들로서는 벌거벗겨진 채 맹수 앞에 내던져지는 느낌일 것이다.
더구나 ‘더 독한 상법’을 향한 여당의 질주는 ‘자사주 소각 의무화’가 전부가 아니다. 집중투표제 의무화와 감사위원 분리 선출 확대는 더 속도를 내고 있다. 개정 상법에 더 독한 상법 개정안이 더해질 때의 결과를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2006년 행동주의 투자자 칼 아이칸의 KT&G 공격과 2018년 엘리엇의 현대자동차 공격을 돌이켜 보면 된다.
칼 아이칸은 당시 KT&G 정관상 집중투표제가 가능(대다수 국내 기업은 정관을 통해 집중투표제를 배제함)하다는 점을 활용해 이사회에 자기 몫의 이사를 진출시켰다. 이를 발판으로 KT&G에 알짜 자산 매각 등을 요구했고, 매입 시점으로부터 1년 2개월 뒤 주가가 원하는 만큼 오르자 약 1500억 원의 차익을 챙겨 ‘먹튀’ 했다. 엘리엇의 현대차 공격은 실패로 끝났지만, 단기 수익에 눈먼 헤지펀드가 ‘먹잇감’ 기업을 상대로 얼마나 무리하고 황당한 요구를 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엘리엇은 현대차 연간 순이익의 3.5배에 이르는 5조8000억 원을 배당으로 요구하는가 하면, 경쟁사 최고경영자(CEO)를 이사 및 감사위원 후보로 추천하기까지 했다.지금 여당이 하려는 입법이 완성되면, 외국 투기자본은 이사회나 감사위원회에 자기 세력을 마음대로 심어 아무 때나 경영 기밀과 장부를 들여다보고 무리한 배당 요구를 ‘주주 환원’이라는 이름으로 시도 때도 없이 들이밀 것이다. 그러다 수틀리면 이 핑계 저 핑계로 소송을 걸어올 것이다. 기우가 아니다. 이미 소버린이, 엘리엇이, 칼 아이칸이 행동으로 보여줬던 일들이다. 그나마 이런 ‘맹수’들을 옭아맸던 족쇄를 치워버리겠다는 것이 지금 여당이다.
우리 기업들이 투기자본에 시달려 긴 안목의 투자와 경영을 못 하게 되면 한국 경제의 추락은 시간문제다. 무섭게 성장하는 중국 기업들에 밀려 한국 기업들이 설 자리는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소액주주 보호를 위해 제도 개선은 필요하다. 하지만 입법 우선순위를 가리고, 경영권 불안을 막을 보완입법도 해야 한다. 눈앞의 주가 상승에만 취해 ‘더 독한 상법 개정’을 강행하는 것은 한 끼 고기반찬을 위해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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