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영감과 섬광] 첫서리 내릴 무렵엔 따뜻한 복국을

2 weeks ago 5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인생이 순탄치는 않았다. 내가 못난 탓이 크지만 세상을 움직이는 제도와 질서가 다정하거나 친절하지 않았던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거친 바다를 가로지르는 포경선같이 외로웠던 것은 세상이 내게 국수 한 그릇도 공짜로 내준 적이 없었던 탓이다. 하늘의 별자리들은 조용히 제 궤도를 도는데, 속은 늘 시끄럽고 복잡했다. 모든 일에 늦되었던 터라 자주 상처를 받았다. “나의 안에서는 과거가 우주를 가르는/ 불똥처럼 소리처럼 떨어진다”(어틸러 요제프, ‘희망이 없이’). 이 시구는 모루를 두드리는 망치 소리인 듯 내 안에 메아리친다. 인생이 식은 카레를 떠먹는 기분일 때 나는 어틸러 요제프와 윤동주의 시집, 면양말 몇 켤레, 그리고 영양과 맛, 식감을 따지며 먹는 음식에서 위안을 얻는다.

해조류·염분 뒤섞인 그 맑은 맛

[장석주의 영감과 섬광] 첫서리 내릴 무렵엔 따뜻한 복국을

오늘 점심엔 오래 알고 지낸 지인들과 복국을 먹으러 갔다. 복국은 철을 가리지 않고 먹는 음식이다. 나는 여름보다는 찬바람 날 때 먹는 복국이 더 맛있다. 첫서리 내리고 날이 차가워지면 복국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복국은 복어가 주재료다. 콩나물, 무, 두부 따위와 미나리 한 줌을 얹은 국물에 식초 두어 방울을 넣으면 맛이 새콤하고 시원해진다. 미나리를 젓가락으로 집어 양념간장에 찍어 넣는데, 입안에서 미나리 향이 확 퍼진다. 복국의 맑은 국물 맛은 뭐랄까? 그건 흙냄새를 품은 육지나 산의 맛과는 다르다. 그건 해조류와 심해 어둠과 염분과 미량의 무기질이 뒤섞인 바다의 맛이다.

복어집에서 복 튀김과 복 껍질 무침을 먹는 것도 즐거움을 더한다. 복어의 살을 튀겨낸 요리는 부드럽게 씹힌다. 콜라겐 함량이 많다는 복 껍질과 미나리를 초고추장으로 무친 무침의 식감은 일품이다. 복어회는 내 호주머니 사정으로는 부담스러워 어쩌다가 가끔 먹는다. 복어회는 얇게 뜬다. 얇은 회 아래 있는 접시 무늬가 선명하게 비친다. 복어 회에서는 단맛이 난다. 미처 씹을 새도 없이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복요리를 즐기지만 정작 복어에 대해 아는 건 많지 않다. 복어 내장과 알에는 테트로도톡신이라는 독이 있다. 이것은 청산가리보다 열 배나 더 위험한 독성 물질인데, 몸에 들어가면 호흡 마비, 근육 이완, 감각마비, 구토를 일으키고, 끝내는 죽을 수도 있다고 한다. 예전엔 겨울철마다 복어 알을 주워 끓여 먹은 한 가족이 생명을 잃었다는 뉴스가 종종 나왔다. 이런 살상력을 가진 독 때문에 복어는 전문 자격증이 있는 조리사만 다루도록 제한한다. 최고급 식당의 조리사 중엔 복어 요리에 극소량의 테트로도톡신을 남긴다고 한다. 이건 복어 요리를 먹고 입술이나 혀 등에 가벼운 마비를 느끼는 걸 즐기는 손님에게 베푸는 장난스러운 서비스라고 한다.

뼛속까지 전해지는 위로의 맛

복어는 은복, 밀복, 까치복, 활어복 등이 있는데 그중 가장 비싼 게 활어복이다. 그다음은 까치복, 밀복, 은복 순이다. 복국의 맛을 처음 안 것은 부산의 한 복국집을 다녀와서다. 부산 토박이로 그쪽 일간지 논설위원이던 선배가 단골집이라고 일행을 안내한 복국집이다. 미식가들이 손꼽는 부산의 원조 복국 맛집이라고 했다. 미나리와 콩나물을 듬뿍 넣고 끓인 복국이 뚝배기로 나왔는데, 국물을 떠서 삼키니 세상에 속이 믿을 수 없을 만큼 편안했다. 이젠 그 복국집 상호조차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날 먹은 복국을 잊을 수가 없다.

대구 사는 친구인 S시인이 맛집이라고 데리고 간 ‘감포 은정복집’에선 까치복 맑은 탕을 먹었다. 두부와 무, 콩나물, 미나리 등을 넣는 것은 다른 복국집과 다를 바 없었다. 복어 살이 부드럽게 씹히면서도 쫄깃하다. 더 싱싱한 복어를 쓰는 게 아닌가 짐작한다. 대구를 방문할 때마다 감포 은정복집을 찾는다. 잡맛이 일체 배제된 맑은 복국은 뜨거울 때 먹어야 제맛을 알 수가 있다. 가끔 복국 국물을 수저로 뜨다가 순간 울컥한다. 그건 복국에서 받은 위로가 뼛속까지 느껴지는 까닭이다. 덧붙여 복국을 먹은 뒤엔 세상이 만만해 보이는 효과도 있음을 적어둔다.

출판사 창업 뒤 여러 베스트셀러를 만들었다. 그중 한 해 동안 200여 만 부가 나간 책도 있다. ‘기획의 천재’라는 말을 들으며 출판사를 키웠지만 잘못된 선택으로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져 인생을 망가뜨렸다. 돌아보니, 일장춘몽같이 지나간 일이다. 이게 공훈을 받을 만한 자랑거리는 아니더라도 달콤한 성공에 이어 감옥까지 다녀온 자에게 복국 한 그릇은 축복이나 마찬가지다.

'먹다'와 '살다'라는 동사는 한 뜻

선량하고 유쾌한 벗을 만나 복국을 함께 먹는 것은 우정을 다지는 의례이고, 차고 메마른 삶에 뜨거운 기쁨을 채우는 의식이다. 날이 쌀쌀할 때 복국을 먹을 수 있는 자는 복될지어다! 복국의 뜨거운 국물을 떠먹을 때 내 마음은 착하고 유순해진다. 그렇다고 복국이 불멸과 명예를 약속하는 법은 없다. 그저 허기를 달래고 하루 정도 유효한 사소하고 평범한 즐거움을 보장할 뿐이다.

음식이 원기를 북돋우고 필수 영양분을 준다는 맥락에서 ‘먹다’와 ‘살다’라는 동사는 한 뜻이다. 한 점 의혹도 없는 진리다. 제철 음식이 이롭다는 말을 잘 따르고, 어떤 음식이든지 반찬 투정 없이 잘 먹는 건 나의 덕성일 테다. 삶은 ‘무엇을 어떻게 먹을 것인가’에 따라 다른 형태로 빚어진다. 음식이 삶의 질을 결정한다. 나란 존재는 내가 먹은 것의 총체라고 할 수 있을 테다.

맑은 복국을 먹은 사람은 내면이 맑아지는 것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누구와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우리가 어떤 인간인가를 드러낸다. 당신의 오늘 점심은 무엇이었나? 그걸 말해 준다면 나는 당신의 인격과 취향에 대해 몇 마디를 첨언할 수가 있을 테다.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