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의 무비홀릭]선을 넘어라, 그것이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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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그저 사고였을 뿐’.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이란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그저 사고였을 뿐’.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이승재 영화평론가·동아이지에듀 상무

이승재 영화평론가·동아이지에듀 상무
[1] 만삭인 아내, 어린 딸을 데리고 한밤중 단란하게 시골길을 운전하던 남자의 차가 개를 친 후 서버려요. 다행히 근처 정비소가 문을 닫질 않았네요. 남자의 차를 수리하던 정비공 ‘바히드’는 의족을 한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는 소스라쳐요. 과거 자신을 고문했던 악마 같은 정보관의 목소리와 똑같았으니까요! 하지만 당시 자신을 포함한 납치, 감금, 고문 피해자들이 모두 안대로 눈을 가렸던 터라, 그놈인지 100% 확신할 수가 없어요. 삐걱삐걱 기분 나쁜 의족 소리, 그리고 꿈속에서도 잊지 못할 낮은 목소리는 그놈임이 분명한데…. 복수를 위해 일단 남자를 납치한 바히드는 피해자들을 일일이 찾아가 확인을 구해요. 그놈인가, 아닌가. 그런데 이게 웬 난감한 일? 피해자들의 의견이 분분해요. 자, 바히드는 남자를 죽일까요, 놔줄까요?

올해 칸 국제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은 이란 감독 자파르 파나히의 ‘그저 사고였을 뿐’(1일 개봉)이에요. 확신은 의심으로 변하고,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가 무너지려 해요. 아, 여기서 스톱! 이 영화는 기대만큼 쫄깃하거나 장르적이진 않아요. 오히려 국가의 억압은 여전히 진행형임을 말하려 하죠. 남자의 정체를 밝히는 과정에서 바히드는 뇌물이나 급행료, 크고 작은 폭력이 만연한 국가 시스템에 또다시 상처받고 고개를 떨궈요. 바히드를 불구로 만든 것으로 고문은 끝나지 않았던 거죠. 복수에 나선 이 불쌍한 소시민을 자신이 당했던 고문보다 더 죄스러운 딜레마 속으로 빠뜨리는 게 ‘신’을 내세운 권력 집단, 국가가 파놓은 진짜 진창이었어요.

이 작품으로 파나히는 세계 3대 영화제인 베니스, 베를린, 칸 영화제에서 모두 최고상을 받은 현존하는 유일한 감독이 되었어요. 파나히는 이란 독재와 가부장적 관습의 뼈를 때리는 영화들로 뜨겁게 성장했어요. 두 번 투옥됐고 자택 구금에 출국 금지까지 당했던 그는, 몰래 찍은 영화를 담은 USB 메모리를 케이크 속에 숨겨 베를린 영화제에 출품할 만큼 목숨 건 창작을 이어왔죠. ‘3개의 얼굴들’(2021년)이나 ‘노 베어스’(2024년) 같은 최근작을 보면 파나히는 이미 충분할 만큼의 영화적 완성도를 증명하지만, 그를 거장 반열에 올려놓은 건 아무래도 절대 권력에 저항하는 용기가 아닐까 말이에요. 그가 이란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3대 영화제를 석권할 수 있었을까….

[2] 예술의 본질은 아름다움을 뛰어넘는(아니 극복하는) 절실함이 아닐까요? 지배자가 피지배자들을 겁박하고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법, 전통, 관습이란 이름의 한계선을 돌파하면서 가장 본래적인 인간의 존재와 자유, 의지가 무엇이었는지를 일깨워 주는 것이 예술의 역할이 아닐까 말이에요. 한국 독립영화 ‘페르소나: 이상한 여자’(1월 개봉)에도 이런 눈부신 대사가 나와요. “예술은 선을 넘는 것이다. 태초의 세상에 선은 없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다스리기 위해 법, 규율이란 선을 만들어 인간들을 가두었다. 넘지 마시오! 하지 마시오! 예술은 그 선을 뛰어넘어 태초의 인간으로 돌아가는 행위다.”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들은 선(線)의 모습을 하고 있어요. 휴전선도 선이고, 애치슨 라인도 선이고, 핵확산금지조약(NPT)도 선이고, 결혼과 이혼도 선이죠. 생각해 보니, 3500억 달러를 미국에 현금 투자해야만 한국산 자동차 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춰 주겠다는 트럼프의 관세 전쟁(이라기보단 ‘관세 다구리’에 가깝지만)도 선이고, 토지거래허가구역도 선이고, 주택담보인정비율(LTV)도 선이고,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도 선이네요. 위험하니까 넘지 마! 선의 본질은 이것일까요? 아니면, 약자가 강자를 감히 넘보지 못하도록 그어놓는 피맛 나는 통행금지선일까요?

[3] 아하! 이제 짐작이 가요.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9월 개봉)가 올해 베니스 영화제에서 왜 수상에 실패했는지를. 숨 막히는 미장센, 주인공(이병헌)의 숙명적 취미인 나무 가꾸기와 주인공이 끝끝내 스스로 치료하지 않는 치통에 숨은 풍부한 은유와 상징, 그리고 마법 같은 카메라 무빙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완벽에 가까운 미학적 성취가 오히려 독이 된 건 아닐까 말이에요. 르네 마그리트의 초현실주의 그림을 마주하는 듯 압도적 환상이 유발되는 비주얼 탓에, 자본주의 질서에 내재된 폭력성과 그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개인의 도덕적 딜레마라는, 가장 현실적이어야 할 메시지가 잡아먹히며 설득력을 잃어버린 건 아닐까 말이에요.

물론, 메시지만이 영화의 전부는 아니에요. 프랑스 누벨바그를 이끈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은 “메시지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영화를 찍지 말고 차라리 우체국에 가서 전보를 치라”고 했죠. 하지만, 유식해 보이지 않더라도 죽기 살기로 용감한 것, 불온한 질문으로 전진하며 정치 권력의 흉계를 깨부수는 것도 예술의 존재 이유입니다. 태도가 예술입니다.

이승재 영화평론가·동아이지에듀 상무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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