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이승우 기자 = 민주주의는 우리 사회에서 금과옥조 같은 절대 가치로 여겨진다. 그런데 근대화 기간 유입된 전문 용어가 대부분 그랬듯 외국어를 번역해 들여온 이 단어는 사실 사상이나 주의가 아닌 정치 체제를 뜻한다. 민주주의는 모두 알듯 영어로 democracy인데, 제도 발상지인 그리스의 고대어에서 유래한 말이다. 대중, 군중을 뜻하는 demos와 권력 형태나 제도를 칭하는 cracy를 합친 것으로, 대중이 권력을 갖는 '시스템'이니 민주정(民主政) 이란 용어가 정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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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theocracy), 귀족정(aristocracy), 독재정(autocracy), 관료정(bureaucracy) 등 cracy가 뒤에 붙은 용어는 모두 '-정'으로 번역한다. 이념과 사상은 인본주의(humanism), 공산주의(communism)처럼 -ism이 붙는다. 민주주의에 해당할 democratism이란 단어도 따로 있다. 그런데 왜 민주정만 민주주의로 번역됐을까. 다수 학술·전문용어가 일본을 통해 유입된 만큼 일본식 번역 오류가 비판 없이 그대로 쓰였다는 설도 있다.
어떤 개념에 맹점이 있다면 사고 왜곡이 뒤따를 가능성이 커지게 된다. 일상언어학에 사상적 토대를 제공한 천재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내가 쓰는 언어의 한계가 내가 사는 세계의 한계"라고 했다. 우리가 쓰는 용어에 우리 사고가 좌우되고, 우리가 보고 생각할 수 있는 폭은 평소 사용하는 단어를 넘어설 수 없다는 얘기다.
주객전도라는 말이 있듯 목적과 수단의 혼동은 경계할 대목이다. 정치 행위의 목적은 무리가 동의하는 수준에서 권력을 배분하고 운용해 각자가 최대 행복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시스템은 수단일 뿐인데, 수단이 사상으로 규정될 경우 구성원들은 이를 목적으로 오인할 수 있다. 권력이 미약한 다수 개인에게는 수단의 형태보다 궁극적 목적에 실제 도달할 수 있는지가 중요할 것이다.
태평성대로 일컫는 요순시대(堯舜時代)의 일화는 정치 체제라는 형식보다 목적 구현이라는 내용이 중요하다는 논리를 뒷받침한다. 요 임금 시절 농부들은 땅을 두드리며 만사태평을 기리는 격양가(擊壤歌)를 불렀다. '해 뜨면 일하고 해 지면 편히 쉬네. 우물 파 물 마시고 논밭 갈아 밥 먹으니 임금의 힘이 어찌 내게 미친다 하리'. 왕정이었는데도 왕이 있는지 없는지, 왕의 치세가 좋은지 나쁜지, 정치 체제가 무엇인지 생각할 필요도 없을 만큼 정치가 완벽했다는 의미다.
민주정은 모두가 주권을 갖고 국가를 합의 운영한다는 공화정과 함께 인류가 만든 정치 시스템 중 현재까지 최선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다수의 독재가 가능해 중우정치(衆愚政治)로 변질할 약점도 지적된다. 카를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대놓고 불가피한 과정으로 규정할 정도였다. 이런 속성 탓에 민주정 아래에선 정파가 종교화할 위험성도 있다. 종교화한 진영 논리에서는 상대는 적이자 투쟁 대상이므로 '우리 편은 선, 상대편은 악'이라는 이분법에 빠져 오히려 민주정이 퇴보하는 역설을 초래한다.
현인들은 이런 민주정의 약점에 부정적 견해를 자주 드러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부터 벤저민 프랭클린, 토머스 제퍼슨 등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지성으로 불렸던 이들이 민주정의 위험성을 더 주목했다. 대중의 무지, 양적 계량만 가능한 다수결, 다수의 폭력성, 선동 시 취약성, 더 강력한 독재로 악화할 가능성 등을 우려했다. 프랭클린은 "민주정은 늑대 두 마리와 양 한 마리가 저녁으로 뭘 먹을지 결정하는 것"이란 말을 남길 정도였다.
이런 함정을 고려해 대부분 현대 민주국가는 민주정과 공화정을 조화한 '민주공화정'을 표방한다. 우리나라도 헌법 제1조 1항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란 명제로 국가 체제를 분명히 했다. 왕정 시절 대다수는 왕정이 영원할 것으로 믿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정치 제도는 인류가 조화롭게 잘살기 위한 수단일 뿐이며 시대에 맞춰 계속 형태를 바꿔가며 진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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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lie@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5년07월10일 08시06분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