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로] 멍석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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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이승우 기자 = 멍석은 짚을 엮어 짠 깔개다. 주로 수확한 작물을 널어 말리는 데 썼으나 초상, 혼례 등 집안 행사가 있을 때 마당에 깔아 손님을 앉히기도 했다. 이처럼 풍요나 애경사를 연상케 하는 도구인 멍석은 조선시대에 잔인한 용도로 쓰인 사례가 더 익숙하게 들린다. '멍석말이'란 말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다.

멍석말이는 사람을 멍석으로 말아 마구 때리는 미개하고 야만적인 벌이다. 심지어 포도청 등에서 공식 집행하던 형벌이 아닌 사형(私刑), 즉 사적 제재였다. 마을이나 이익집단 등에서 규율이나 관습을 어겼다고 판단한 사람을 상대로 여론 주도층이 일종의 여론 재판을 해 집행 여부를 결정했단다. 억울한 이가 나올 수밖에 없는 불합리한 구조다. '무속과 점의 나라'란 오명답게 진단하기 어려운 병에 걸린 사람을 "귀신 들렸다"고 지목하고 귀신을 때려 쫓고자 환자에게 멍석말이를 행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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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자료사진. 촬영 이충원. 재배포 DB 금지]

김주영의 대하소설 '객주'에서는 보부상들이 규칙을 어긴 동료를 멍석말이로 제재한다. 최명희 대하소설 '혼불'에서는 지배 계급인 사대부 양반이 피지배층인 중인, 상민, 노비를 억압하고 신분 질서를 유지하려는 수단으로 멍석말이를 활용한다. TV 외에 별 오락거리가 없던 시절 '전설의 고향', 'TV 문학관' 같은 드라마에서도 멍석말이 장면을 본 기억이 난다. 그런데 멍석말이는 당시 사람들에게 억울함의 상징이었던 것 같다. 대부분 작품에서 멍석말이 대상은 억울하게 당하는 것으로 묘사됐다. 사법 체계가 아닌 여론재판이니 아무래도 그럴 확률이 높다.

멍석말이의 특징에는 야만성도 있지만 무엇보다 익명의 폭력성이 도드라진다. 사람을 돌돌 말아놓으니 맞는 이는 누가 때리는지 볼 수 없고, 패는 사람도 맞는 사람이 누군지 모른다. 그러니 린치를 가하는 자들은 죄책감 없이 사람을 마구 때릴 수 있어 불구가 되거나 죽기도 한다. 멍석말이를 당한 사람이 후일 죄가 없다고 밝혀져도 다수가 폭행 공범인 상황에서 진실은 전혀 중요치 않게 된다. 집단 내 불만이 쌓였을 때 희생양을 하나 정해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방법으로 활용했단 설도 있다.

야만적 집단 폭력은 어느 나라에나 있었지만, 우리의 멍석말이 같은 형태는 찾기 쉽지 않다. 무리 안에 숨으면 괜찮다는 인식일 걸까. 지금도 여전히 멍석말이의 DNA는 변하지 않고 우리 피에 흐르는 듯하다. 21세기 한국에선 인터넷 악성댓글이나 커뮤니티 게시판 음해, 여론 재판 등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익명성과 집단주의가 합쳐지는 순간 멀쩡하던 사람도 악마가 된다. 실제로 요즘도 온라인에선 '멍석말이'나 '조리돌림' 같은 단어가 쓰인다.

이미지 확대 소리 없는 흉기 악플 댓글문화 개선책은?(CG)

소리 없는 흉기 악플 댓글문화 개선책은?(CG)

[연합뉴스TV 제공]

온라인 멍석말이가 시작되면 누구도 사실관계를 따져보지 않는다. 이렇게 여론재판이 진행되면 대상자에겐 '주홍글씨'가 찍힌다. 가끔은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지는 비극적 결과도 나온다. 이런 폐단과 문제점은 사회에서 되풀이해 이슈화하지만, 그때뿐 개선되지 않는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가수 설리와 구하라 사건도 이미 까맣게 잊혔다. 두 젊은 여성이 세상을 떠난 뒤 인터넷은 온통 추모 글로 뒤덮였다. 하지만 추모 글을 쓴 이들과 악플을 달았던 이들이 다른 사람일 거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동네에서 멍석말이가 열린다길래 신나서 달려가 구경하다 나도 함께 발로 멍석에 싸인 사람을 밟았는데, 나중에 보니 우리 아버지더라" 하는 내용의 민담도 들어봤다. 함부로 멍석 말지 말자. 멍석 속 사람이 우리 부모, 자녀, 형제일 수 있다. 설사 친지가 아니더라도 억울한 매타작의 대상인 사람 입장에 잠시라도 이입한다면 그렇게 잔인한 짓을 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요즘 유튜브에는 우리 주변에 소시오패스가 생각보다 많다는 정신과 전문의들의 영상이 유행처럼 올라온다. 그들이 평소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생각하니 오싹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우리 동료와 이웃이 선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믿고 사는 게 정신건강에 좋을 것 같다.

leslie@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5년06월14일 07시05분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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