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정임수]빚 탕감 ‘산소호흡기’로 연명하는 개미지옥

3 days ago 2

정임수 논설위원

정임수 논설위원
이재명 대통령이 성남시장 시절 빚으로 고통 받는 서민을 돕겠다며 만든 게 ‘주빌리은행’이다. 50년마다 노예를 풀어주고 빚을 탕감해주던 성경 속 희년(禧年), 주빌리에서 이름을 따왔다. 이 대통령은 4일 충청권 시민들과 만나 이를 소개하며 “문명사회에서 죽을 때까지 빚지는 것은 비극”이라고 했다. 그런데 한국에선 5년마다 ‘부채 희년’이 찾아온다. 노태우 정부부터 현 정부까지 정권이 바뀌면 어김없이 농가 부채 탕감, 신용 사면, 장기 연체 면제 같은 대규모 빚 감면 정책이 반복되고 있어서다.

李정부, 123만 명 22兆 빚 없애기로

주빌리은행장 출신답게 이재명 정부는 역대급이다. 자영업자 등 취약계층 113만 명을 대상으로 7년 이상 연체된 5000만 원 이하의 빚을 일괄 탕감해주기로 했다. 또 코로나 위기로 피해를 입은 소상공인 10만 명은 연체 원금을 최대 90%까지 깎아준다. 123만여 명의 개인·자영업자가 안고 있는 22조6000억 원의 빚을 없애주겠다는 것이다. 생계를 위협받는 취약계층을 지원하고 재기를 돕는 건 정부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특히 팬데믹 대응 과정에서 빚의 수렁에 빠진 영세 자영업자들이 불황의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도록 하려면 어느 정도의 채무 조정은 불가피하다.

문제는 역대 정부마다 되풀이된 빚 탕감 정책이 취약계층의 여건을 장기적으로 개선시키기보다는 ‘빚으로 빚을 막는’ 구조적 위험을 더 키웠다는 점이다. 소득 하위 20%인 취약계층의 신용대출액 추이를 살펴보면, 탕감이 있을 때 반짝 줄었다가 다시 늘어나는 행태를 반복한다. 과거 구제 대상자의 20%가 다시 빚을 내 신용불량자(금융채무불이행자)로 전락했다는 통계도 있다. 지난 정부에서 연체 소상공인·자영업자의 빚을 감면해주는 새출발기금이 출범했지만 금융회사 3곳 이상에서 빚을 낸 저소득·저신용 자영업자는 3년 새 50% 급증했다.

무엇보다 일회성 빚 탕감으로는 고질적인 공급 과잉으로 ‘개미지옥’이 된 자영업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팬데믹을 거치면서 전체 취업자에서 자영업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20% 밑으로 떨어지긴 했지만, 주요 선진국에 비하면 여전히 2∼3배 높다. 괜찮은 일자리가 부족해 청년층부터 조기 퇴직한 베이비부머까지 대거 생계형 창업에 뛰어드는 탓이다. 준비도 없이 성급하게 창업한 뒤 빚으로 버티다가 폐업으로 내몰리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자영업자 3명 중 1명은 월평균 최저임금(월 210만 원)도 못 버는 신세다. 2차 베이비붐 세대(1964∼1974년생)가 본격적으로 은퇴하면 상황은 더 심해질 게 뻔하다.

과포화 자영업 구조조정 병행해야

이 같은 구조적 위기를 방치한 채 부실이 쌓인 자영업자에게 채무 조정과 탕감을 반복하는 건 국민 혈세를 부어 ‘좀비 자영업자’만 늘리는 꼴이 될 수 있다. 회생 가능성이 있는 소상공인에게 흘러갈 자금 여력까지 막아 자영업 생태계의 지속 가능성을 해칠 우려도 있다. 더군다나 이 대통령은 4일 행사에서 “추가 탕감”까지 언급했는데, ‘안 갚고 버티면 된다’는 도덕적 해이를 부추길 소지가 크다. 현 정부가 내건 탕감 조건(7년 이상 연체, 5000만 원 이하)의 빚을 이미 성실하게 갚은 사람이 361만 명인데, 이들이 느끼는 박탈감은 상당하다.

정부는 빚 탕감 전력이 있는 사람을 걸러내는 등 엄격한 기준을 마련해 부작용을 최소화해야 한다. 아울러 고통스럽더라도 빚으로 연명하는 한계 자영업자를 솎아내는 구조조정을 서둘러야 한다. 폐업 기로에 놓인 자영업자를 돕는 근본 처방은 단기적 채무 구제가 아니라 질서 있는 출구를 마련하고 맞춤형 직업교육, 일자리 알선 등을 통해 취업 기회를 열어주는 것이다. 위기의 자영업을 언제까지 빚 탕감 ‘산소호흡기’로 연명시킬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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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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