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정부, 123만 명 22兆 빚 없애기로
주빌리은행장 출신답게 이재명 정부는 역대급이다. 자영업자 등 취약계층 113만 명을 대상으로 7년 이상 연체된 5000만 원 이하의 빚을 일괄 탕감해주기로 했다. 또 코로나 위기로 피해를 입은 소상공인 10만 명은 연체 원금을 최대 90%까지 깎아준다. 123만여 명의 개인·자영업자가 안고 있는 22조6000억 원의 빚을 없애주겠다는 것이다. 생계를 위협받는 취약계층을 지원하고 재기를 돕는 건 정부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특히 팬데믹 대응 과정에서 빚의 수렁에 빠진 영세 자영업자들이 불황의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도록 하려면 어느 정도의 채무 조정은 불가피하다.
문제는 역대 정부마다 되풀이된 빚 탕감 정책이 취약계층의 여건을 장기적으로 개선시키기보다는 ‘빚으로 빚을 막는’ 구조적 위험을 더 키웠다는 점이다. 소득 하위 20%인 취약계층의 신용대출액 추이를 살펴보면, 탕감이 있을 때 반짝 줄었다가 다시 늘어나는 행태를 반복한다. 과거 구제 대상자의 20%가 다시 빚을 내 신용불량자(금융채무불이행자)로 전락했다는 통계도 있다. 지난 정부에서 연체 소상공인·자영업자의 빚을 감면해주는 새출발기금이 출범했지만 금융회사 3곳 이상에서 빚을 낸 저소득·저신용 자영업자는 3년 새 50% 급증했다.무엇보다 일회성 빚 탕감으로는 고질적인 공급 과잉으로 ‘개미지옥’이 된 자영업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팬데믹을 거치면서 전체 취업자에서 자영업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20% 밑으로 떨어지긴 했지만, 주요 선진국에 비하면 여전히 2∼3배 높다. 괜찮은 일자리가 부족해 청년층부터 조기 퇴직한 베이비부머까지 대거 생계형 창업에 뛰어드는 탓이다. 준비도 없이 성급하게 창업한 뒤 빚으로 버티다가 폐업으로 내몰리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자영업자 3명 중 1명은 월평균 최저임금(월 210만 원)도 못 버는 신세다. 2차 베이비붐 세대(1964∼1974년생)가 본격적으로 은퇴하면 상황은 더 심해질 게 뻔하다.
과포화 자영업 구조조정 병행해야
이 같은 구조적 위기를 방치한 채 부실이 쌓인 자영업자에게 채무 조정과 탕감을 반복하는 건 국민 혈세를 부어 ‘좀비 자영업자’만 늘리는 꼴이 될 수 있다. 회생 가능성이 있는 소상공인에게 흘러갈 자금 여력까지 막아 자영업 생태계의 지속 가능성을 해칠 우려도 있다. 더군다나 이 대통령은 4일 행사에서 “추가 탕감”까지 언급했는데, ‘안 갚고 버티면 된다’는 도덕적 해이를 부추길 소지가 크다. 현 정부가 내건 탕감 조건(7년 이상 연체, 5000만 원 이하)의 빚을 이미 성실하게 갚은 사람이 361만 명인데, 이들이 느끼는 박탈감은 상당하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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