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정은]낯선 해외에서 대사관만 믿었다간

2 weeks ago 7

이정은 부국장

이정은 부국장
마약과 납치, 강도 사건이 빈발한다는 남미의 한 저개발국으로 출장을 간 적이 있다. 비행기를 두 번 갈아타고 40시간 가까이 가야 하는 이국땅에서 갱단에게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갈 수 있다는 불안함이 올라왔다. 출발 전, 알고 지내던 외교관에게 “혹시라도 내가 실종되면 찾아서 구해 달라”고 부탁했다. 농담 섞인 인사였지만 비빌 데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든든했다.

캄보디아에서 벌어진 20대 한국 청년의 사망 사건과 이후 쏟아진 현지 증언들은 당시의 믿음에 새삼 의문을 갖게 만든다. 범죄 단지에서 간신히 탈출해 찾아간 한국대사관 앞에서 “업무시간이 종료됐다”는 이유로 문전박대를 당했다는 사례들이 잇달아 나왔다. 대한민국 주권이 미치는 영역으로의 진입을 코앞에서 거부당한 이들은 언제 다시 범죄조직에 붙잡혀 보복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막막함에 떨었을 것이다. 가족의 납치 피해 호소에 “본인 신고가 원칙”이라고 안내했다거나 자력 탈출을 권고했다는 부분에 이르면 말문이 막힌다.

실패한 보호, 뒤늦은 조치

정부는 부랴부랴 대책을 쏟아내고 있다. 국가안보실장이 직접 브리핑에 나서고, 외교부 2차관이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과 함께 현지에 급파됐다. 외교부 장관은 동남아 국가의 공관장들을 모아 화상회의를 열었고, 대응 방안 브리핑도 했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은 ‘고문의 극심한 통증’이 유발한 심장마비로 한국인이 사망한 지 석 달이 지나서야 나왔다. 한국인 피해가 급증하고 있다는 지적이 지난해부터 나왔지만 적극적으로 대처했다고 할 만한 조치는 없었다.

해외에서 범죄에 연루되거나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어리석은 선택을 피하며 스스로를 지킬 1차적 책임은 물론 본인에게 있다. 그러나 관광지나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도 말이 통하지 않는 낯선 나라에서는 여권과 돈을 뺏기면 그대로 무방비 상태로 위험에 노출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억울한 누명을 썼는데 신뢰할 사법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곳들도 있다. 막다른 곳에서 기댈 곳은 나를 지켜줄 나라뿐이다. 헌법에도 규정돼 있는 ‘재외국민 보호’ 의무를 지키지 못하는 국가는 존재의 뿌리부터 흔들린다.

동남아나 남미 국가의 공관 중에는 상주 인력이 5인 안팎에 그치는 곳이 상당수인 게 현실이긴 하다. 소수 외교관들이 영사와 정무, 경제 등을 모두 맡아 북 치고 장구 치는 식으로 일한다. 그렇다고 업무를 소홀히 다룬 안일함에 변명이 될 수는 없다. 대사관 기강을 다잡으며 대응을 진두지휘할 캄보디아 대사는 막상 몇 달째 공석이다. 전임 정부에서 임명됐다는 이유로 30여 명의 해외 공관장이 일괄 귀임 조치된 뒤 후임 인선은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는 탓이다.

험지 특성 반영해 공관 인력 채워야

대사관에 투입되는 직군별 인력이 현지 특성에 맞게 효율적으로 배분돼 있는지도 의문이다.

살인, 납치처럼 생명을 위협하는 중범죄가 빈발하는 나라에서는 구금시설 정기면회 같은 영사 담당자의 사후 조력만으로는 자국민 보호에 한계가 있다. 현지 수사당국과 수시로 교류하며 급박한 상황 발생 시 실시간으로 대응할 경찰 인력을 늘리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쿼터에 묶인 인력과 예산 문제를 마냥 외면할 때가 아니다. 5월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나 7월 미국 의회 보고서가 지적했듯이 동남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취업사기, 인신매매 등 범죄는 처벌이 약한 국가로 이동하며 기승을 부리고 있다. 자발적인 범죄 가담자도 있겠지만, 이들에게 속아 넘어간 피해자들도 그만큼 늘어날 수밖에 없다. 지금도 이국땅 어디선가 탈출을 시도하는 한국 청년들이 있을지 모른다. 이번 사태의 진화에 부심하는 정부의 총력전이 일회성으로 끝나서는 안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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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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