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병채 ROC(Reason of creativity) 대표최근 WIRED 정치 특집호의 메인 이미지는 테크노크라시(Technocracy)의 풍자를 압축한 장면처럼 보인다. 테크노크라시는 과거 과학, 공학적 지식과 기술적 효율성으로 사회를 운영하자는 이상으로 시작됐으나 오늘날엔 기술, 데이터, 전문가 집단이 민주적 책임 없이 정책과 사회를 좌우하는 구조에의 표현에 더 적합해졌다.
해당 이미지 내 시바견으로 변한 테크 자이언트들은 트럼프 대통령과 함께 포커 테이블에 둘러앉아 카드를 주고받는다. 테이블 위엔 포커 칩과 카드가 수북이 쌓여 있다. 확률, 정보 비대칭, 은밀한 협상을 상징하는 해당 이미지는 대중이 익숙하게 여기는 '기술의 중립성'을 깨고 빅테크, 정치, 금융이 얽힌 내부자 게임의 풍경을 보여준다. 누가 더 많은 패를 쥐고 있는지가 곧 권력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벽면을 보면 제프 베이조스를 비롯한 초상화와 도지(Doge) 코인 이미지가 걸려 있다. 이는 밈(meme)과 브랜드가 권력과 결합해 기술기업 리더들을 문화 아이콘, 밈, 정치행위자로 소비하게 만드는 현상을 압축한다. 이는 합리와 데이터, 혁신을 표방하는 이들이 사실은 본능과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개화(犬化)'된 권력자라는 메시지라 할 수 있다.
2025년 9월 4일 백악관에서 열린 만찬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애플 CEO 팀 쿡, 마이크로소프트의 사티아 나델라, 구글의 순다 피차이, 세르게이 브린, 메타의 마크 저커버그, 오픈AI의 샘 올트먼, 오라클의 사프라 캇츠 등 주요 테크 리더들을 초청해 'AI 우위'를 논의했다. 그는 이들을 'high IQ group'이라 칭했다. 결국 WIRED의 표지는 '풍자'가 '현실'로 된 장면을 압축해 표현했다 할 수 있다.
해당 기업들은 실제로 트럼프 정부의 정책 아래 여러 약속과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인텔은 미국 내 반도체 제조와 안보 역량 강화를 위해 수백억 달러 규모의 투자와 보조금 합의를 추진 중이고, 애플은 인공지능(AI) 서버용 설비와 칩 공급망을 미국으로 옮기는 계획을 발표했다. 오라클은 틱톡과의 합작을 통해 미국 내 사용자 데이터와 알고리즘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트럼프 행정부는 규제 완화와 AI 개발 가속화를 골자로 한 'America's AI Action Plan'과 여러 행정명령을 내놓았다. 이런 일련의 움직임은 현대 상업적 기술이 실제 정책·투자·데이터 거버넌스에 깊숙이 들어와 있음을 보여준다.
독일의 정치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Max Weber)는 합리화라는 개념을 통해 근대가 합리성과 효율성을 추구하다 결국에는 '철창(iron cage)'을 만들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이 데이터 기반 거버넌스가 공공성을 담보하는 대신 폐쇄적 네트워크와 플랫폼 관료제로 작동할 위험성이 그의 주장과 공명하는 듯 하다. 즉, 합리적 의사결정과 데이터 기반 거버넌스라는 이름으로 실제로는 폐쇄적 카르텔이 작동할 수 있는 구조가 생겨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베버의 경고가 오늘날 더 무겁게 다가오는 이유는 기술이 단순한 도구를 넘어 거버넌스의 형식 그 자체를 바꾸고 있기 때문이다. 알고리즘은 공공정책의 설계와 집행, 여론의 형성, 소비자 행동까지 동시에 관여하며, 데이터를 독점한 극소수 기업과 정부 간의 결합은 사실상 비공개적 입법, 집행에 가까운 힘을 행사한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규제 및 감독의 투명성이 줄어들고, 국민이 정책 과정에 접근하거나 참여할 경로가 협소해진다.
다시 말해, 기술이 효율성과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제시되지만, 그 이면에서는 새로운 권력과 규범을 창출하고 재편하는 '정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을 직시할 때만 비로소 테크노크라시를 단순한 현상이 아니라 공공적 논의와 설계가 필요한 '구조'로 이해할 수 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단순한 기술혁신이 아니라 권력의 구조적 재편이다. 기업과 정부가 만드는 새로운 질서 속에서 공공성과 책임, 그리고 시민의 자유가 어떤 자리에 놓일지에 대한 논의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 하나의 '철창'을 스스로 구축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기술의 속도에 경탄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도가 우리 사회의 규범과 가치에 어떤 흔적을 남길지 끝까지 묻고 설계하는 일이다.
손병채 ROC(Reason of creativity) 대표 ryan@reasonofcreativit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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