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본 세계 최초 주식시장
비슷한 형식의 건물이 이웃 도시인 벨기에 안트베르펜이나 바다 건너 영국 런던에 한발 앞서 지어졌지만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를 세계 최초로 보는 이유는 명확하다. 1602년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가 일종의 기업공개(IPO)를 통해 주주 자격을 국민에게 개방한 최초의 기업이었기 때문이다. 이 최초의 주식회사에 투자된 지분을 오늘날의 주식처럼 2차 거래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 바로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다.
● 세계 첫 주식회사 VOC에 몰린 돈
회랑을 따라 42개의 기둥이 줄지어 서 있는데, 이 기둥들에 오늘날 증권거래소의 전광판이나 모니터처럼 주식이나 거래되는 상품들의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펀드매니저들이 자리를 잡고 거래를 이끌었다. 600평(약 2000㎡) 넘는 공간에 한창 때는 1000명이 넘는 펀드매니저가 활동했다니 상당히 박진감 넘치는 장소였을 테다.
당시 네덜란드 사람들의 부에 대한 열망은 오늘날 못지않았다. 거래소는 오전에만 열렸는데 오후가 되면 주변 광장으로, 밤에는 술집과 식당으로 옮겨가며 거래가 이어졌다. 누구든 투자에 성공하면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다는 기대가 사람들을 시장으로 끌어들였다. 암스테르담 인구 20만 명 중 최대 1만∼2만 명이 주식 거래에 참여했다고 하니, 17세기판 ‘개미운동’이 네덜란드에서 벌어진 셈이다. VOC가 1602년 8월 처음 세워질 때 투자자를 통해 모은 돈은 총 642만9588길더(옛 네덜란드의 화폐 단위)로 알려져 있다. 이 중 절반 이상인 367만9915길더가 암스테르담 지사에서 모였다. 참고로 당시 노동자의 하루 일당은 1길더(약 15만 원)로 전해진다. 그렇다면 9500억 원대의 자본금이 일시에 모였다고 볼 수 있다.당시 기록에 따르면 VOC의 첫 IPO에 투자한 암스테르담 시민 수는 1143명이었다. 가장 ‘큰손’은 피터르 링겐스라는 상인으로 10만5000길더를 투자했다. 이사크 러 메러라는 상인도 8만5000길더를 투자했다. 전체 투자자 중 절반 정도는 1000길더 미만을 투자했다. 그중 100길더 안팎의 소액투자자도 적지 않았는데, 이들의 직업을 보면 하루 일당이 0.5길더였던 하녀들도 포함돼 있다. 아주 평범한 시민들도 적극 투자에 나섰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렇게 VOC가 인류 최초로 주식을 공개 발행해 시민 자본을 끌어들여 장거리 무역에 독점적으로 나선 결과 엄청난 이익을 거뒀고, 여기서 얻은 이익은 투자자들에게 곧바로 돌아갔다.
네덜란드 역사학자 겸 경제학자 로데베이크 페트람이 VOC 암스테르담 지점에서 1602∼1697년 이뤄진 851점의 주식 거래를 분석한 2014년 연구에 따르면 1602년에 100길더였던 VOC 주가는 설립 4년 만인 1606년 200길더를 넘어선다. 이후 등락을 반복하지만 크게 보면 우상향하면서 1700년에는 500길더까지 오른다. 그의 계산에 따르면 최초에 100길더를 투자한 투자자가 배당금까지 꾸준히 재투자했다면 1700년에는 6만5000길더로 불릴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VOC의 규모도 놀랍게 성장한다. 1670년 무렵 VOC는 상선 150척, 군함 40척, 직원 5만 명, 군사 인원 1만 명을 거느린 초대형 기업으로 발전했다. 당시 시가총액은 오늘날로 치면 약 8조 달러(약 1경1480조 원). 현재 시점의 애플과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석유기업인 아람코를 합친 것보다 더 컸다.
● ‘자본주의의 그림자’ 비춘 튤립물론 이런 자본시장의 급성장은 큰 부작용도 낳았다. ‘튤립 광풍(Tulip mania)’이 그것이다. 거품의 발단이 주식이 아니라 꽃이라니 의아할 수 있는데, 당시 VOC 주식이 고액이라 보통 사람은 거래가 어려웠다. 이에 새로운 투자처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바로 튤립이 투자 대상으로 급부상하게 된 것이다.
튤립은 당시 유럽에 막 수입돼 온 이국적인 꽃이었다. 탐스러운 꽃망울과 함께 수년간 재배해야 꽃을 피울 수 있어 희귀했다. 이 때문에 좋은 투자 대상이 됐다가 1636년에서 1637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동안 막대한 투기자본이 모이면서 튤립 구근 한 뿌리가 집 한 채 가격을 넘어서는 경우도 나왔다. 결국 사람들이 가격이 너무 올랐다고 여겨 튤립 투기를 멈추자 시장은 얼어붙고 이때부터 튤립 가격은 급격히 하락한다.
역사상 최초의 자본주의적 투기로 알려진 튤립 광풍은 이렇게 자본시장이 급성장하던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벌어진다. 알려진 대로 튤립 투기에 대한 거품이 꺼지면서 파산자가 속출하자 네덜란드 정부가 개입해서 가까스로 위기를 넘긴다.
흥미롭게도 튤립 광풍이 지나간 후에 튤립은 네덜란드 그림 속에 자주 등장한다. 꽃이나 책, 음식 등 사물만 그리는 그림을 정물화라고 하는데 이런 정물화가 17세기 네덜란드 가정집에 한 점씩은 걸려 있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만개한 꽃들 사이로 유독 두드러져 보이는 시든 튤립도 있다. 이는 네덜란드 국민들에게 5년 전 불어닥친 튤립 광풍을 일깨우면서, 나아가 삶의 종착점은 결국 죽음이라는 점을 되새겨 줬을 것이다. 당시 주식 투자에 열을 올리던 네덜란드인들이 이처럼 허무함을 일깨우는 정물화를 좋아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욕망을 다스리는 그림이 일종의 경고문이 돼 가까이에 있었기에 네덜란드 경제는 위기 속에서 나름대로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다. 국내 증시가 ‘신고가 랠리’를 펼치는 등 오래간만에 활황세를 보이면서 균형 있는 메시지가 담긴 무언가가 존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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