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는 곧 기회…기업, 사회도 유기체처럼 대응해야"

‘지속 가능한 문명을 설계하는 엔지니어, 기후 위기·자원 고갈에 맞서는 생존 인프라….’

누군가 기업을 이렇게 정의한다면 어색한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여전히 많은 이들은 기업을 소비자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이익과 생존만 추구하는 존재로 알기 때문이다. 부산 향토 제조기업 DRB(동일고무벨트)의 생각은 다르다. 인공지능(AI) 혁명과 기후 재난이 동시에 밀려오는 시대, 기업의 역할과 조직의 운영 방식 또한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올해 창사 80주년을 맞은 DRB는 최근 <동일고무벨트 방식: 유기체처럼 움직이는 회사 만들기>를 펴냈다. 3세 경영인 김세연 전략고문(사진)과 구성원이 함께 집필한 이 책은 단순히 창사 기념 사사(社史)가 아니다. 경영 현장에서 축적한 실험과 문제의식을 대중 독자와 나누겠다는 목표로 출간해 오는 10월부터 정식 판매된다.

김 고문은 지난 26일 “기념일을 단순히 기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가 마주한 전환기의 질문과 대안을 정리해 보고자 했다”며 “내부 구성원뿐 아니라 사회 각 영역에서 기능이 마비되면서 좌절을 체험한 분들과 고민을 나누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창업주 김도근 회장의 손자이자, 5선 국회의원을 지낸 김진재 전 회장의 아들이다. 김 고문도 3선 의원을 지낸 뒤 정계를 떠나 경영에 전념하고 있지만 미래 설계에도 관심이 많다. 바른정당 시절 시작한 시민 정치 교육과정 ‘청년정치학교’ 교감, 미래의 국가 설계도를 준비하는 ‘Agenda 2050’ 대표로도 활동 중이다.

그는 “행정과 제도가 현실의 복잡성을 감당하지 못해 마비되는 과정을 체험했다”며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기업이 새로운 방식을 설계하고 스스로 먼저 적용하며 이것이 현실에서 작동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한 후 사회와 국가로 더 확산시켜보자는 인식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DRB는 자동차 부품, 건설·농기계 바퀴에 쓰이는 러버트랙, 산업용 벨트 등 특수 고무 제품을 주력 생산한다. 특히 러버트랙은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 기준 세계 1위다. 하지만 김 고문은 ‘잘 해온 것’에 안주하지 않았다. 구성원이 참여하는 실험적 가상 조직 ‘퓨처랩스(Future Labs)’를 세웠다. 현재 10개의 랩이 운영 중이다. 각 랩은 로봇의 착지를 위한 신소재, 로봇이 사람처럼 촉각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고분자 복합기술 등 구체적인 과제를 다룬다. 이 과정은 외부 연구기관, 대학, 스타트업과 협업하며 시제품 제작과 현장 적용까지 이어진다. 랩은 단순한 아이디어에서 그치지 않고 시장과 연결될 수 있는 결과물을 내는 게 목표다.

김 고문은 “지구 온난화와 AI 충격이 동시에 몰려오는 시대에 관료제적 계층 구조를 뜻하는 트리 조직으로는 제 기능을 발휘하기 어렵다”며 “환경 변화를 신속히 인지·공유하지 못하면 조직은 금세 마비된다.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주체들이 리좀(뿌리)처럼 서로 연결돼야 한다”고 말했다. 동일고무벨트는 지난해 KAIST와 공동으로 연구센터를 설립했고, 사내 랩들은 이곳 연구팀들과 유기적으로 협력하며 과제를 수행하고 있다.

김 고문은 “수직적 통제 구조로는 불가능한 시도”라며 “자연 생태계가 수축·폐기·순환을 거듭하며 적응하듯 기업도 적응과 진화를 반복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이제는 점차 속도가 붙고 있다”며 “인류 문명의 전환기에 필요한 질문을 던지고 새 대륙을 개척하는 길을 걷겠다”고 밝혔다.

박종필/사진=임형택 기자 j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