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현의 시각] 산재가 줄지 않는 또다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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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현의 시각] 산재가 줄지 않는 또다른 이유

연간 3명 이상 사망사고가 발생하면 법인 영업이익의 5%를 과징금으로 물리고, 다수 사망사고를 일으킨 건설사는 영업정지·등록말소 조치하며, 외국인 노동자 사망사고를 내면 외국인 고용을 3년간 제한한다.

고용노동부가 지난 15일 발표한 ‘노동안전 종합대책’의 주요 내용이다. 화들짝 놀란 경영계는 “경영 제약은 물론 기업의 존폐를 결정지을 것”이라고 펄쩍 뛰었다. 유례없는 초강경 대책에 법조계에서는 사망사고에 따른 과징금은 위헌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갓 나온 정부안이긴 하지만 논란이 적지 않은 만큼 실제 입법 및 시행까지 갑론을박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어찌 됐든 “장관직을 걸겠다”던 노동부의 산재 감축 의지가 어느 정도인지는 확인됐다. 경영계가 펄쩍 뛰긴 했지만 오로지 최고경영자(CEO) 형사처벌만이 능사라는 기존 증오식 대처보다는 실효성이 있을 것이란 평가도 있다.

초강경 산재대책 내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대책에는 아쉬움을 넘어 한숨을 부르는 대목이 많다. 김영훈 노동부 장관은 그동안 노동자는 보호 객체가 아니라 산재예방 주체여야 한다고 수차례 강조해왔다. 하지만 정부가 내놓은 총 36쪽에 달하는 노동안전 종합대책 자료 어디에도 ‘산재예방 주체’라는 노동자 또는 노조의 의무나 책임은 없다. 오로지 재해조사보고서를 ‘알 권리’, 산업안전보건위원회를 확대해 ‘참여할 권리’, 노동자의 작업중지권 신설 등 ‘피할 권리’만 있을 뿐이다. 심지어 산재와 관련된 신고 포상금제도를 운영하겠다면서 신고 대상은 사업주의 안전보건조치 의무 위반(50만원), 산재 은폐·정부명령 미이행(500만원)만 적시했다.

산재 사망사고의 80% 이상이 50인 미만 소규모 사업장에서 발생하고, 이 중에는 노동자의 안전불감증 또는 비정상적 행동에서 비롯된 사고가 적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말 못 하는 ‘불편한 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만 때린다고 산재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노동자 경각심 깨워야 효과

이번 대책뿐만이 아니다. 정부도 문제점을 알지만 외면하는 산재 관련 제도는 또 있다. 이른바 ‘산재 무과실 책임주의’, 출퇴근을 포함해 업무와 관계만 있으면 근로자의 고의·자해나 범죄행위가 아닌 이상 과실 여부와 상관없이 산재 인정을 해주는 제도다. 산재보험료를 납부하는 기업 입장에서 보면 사용자의 의무 위반 등 잘못이 없더라도 ‘산재=사용자 책임’이 되는 셈이다.

제도가 이렇다 보니 법원에서는 중앙선 침범은 물론 무면허 사고에도 산재를 인정하는 판결이 잇따르고 있고, 인터넷 포털사이트에는 “신호위반 산재 포기하지 마세요”라는 노무사들의 영업 게시글이 넘쳐난다. 물론 법원의 이런 판결은 산재보험법의 취지가 근로자 처벌이 아니라 보호에 있다는 점과 최근 급증한 플랫폼 노동의 현실을 반영한 것일 테다. 그럼에도 산재는 오로지 사용자 책임이라는 일련의 정책이 안전의식 제고와는 정반대 메시지를 주는 것은 아닐까.

물론 안전장비를 착용하지 않고 신호위반을 했다고 해서 일하다가 다친 사람의 밥줄을 끊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정책이나 입법이 노동자들에게도 최소한의 경각심을 주고 책임의식을 갖게 해야만 아침에 현관문을 열고 나간 남편이 돌아오지 못하는 비극을 줄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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