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시간’을 재료로 만든 예술이다. 회화나 조각은 공간 안에 고정되어 언제든 다시 볼 수 있지만, 음악은 무대 위에서 한 번 연주되면 그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시작과 동시에 사라지는 운명, 그것이 음악이다. 그렇기에 작곡가는 중요한 대목을 한 번만 말하지 않는다. 흘러가 버리면 붙잡을 수 없으니, 청중의 기억 속에 남기기 위해 되새기듯 반복하는 것이다. 음반이나 스트리밍 서비스가 없던 시대에는 이 점이 훨씬 절실했다. 실제로 음악을 접할 기회 자체가 드물었기 때문에 반복은 청중에게 음악을 각인시키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기도 했다.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반복의 필요성은 더욱 분명해진다. 오늘날처럼 일상적으로 음악이 넘쳐흐르는 환경과 달리 과거의 사람들에게 음악은 특별한 순간에만 만날 수 있는 드문 체험이었다. 지금처럼 원할 때마다 음반을 틀거나 스트리밍으로 감상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으니 실제로 음악은 교회 미사나 축제, 귀족의 연회 같은 특정한 자리에서만 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작곡가들은 중요한 구절이 잘 들리도록 같은 선율을 여러 번 불렀다. 예를 들어 미사곡에서 ‘키리에 엘레이손(Kyrie eleison·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같은 기도가 몇 차례 되풀이되는 것도 단순한 종교적 형식 때문만은 아니었다. 듣는 이들이 그 짧은 순간을 더 깊이 새길 수 있도록, 그리고 다시 들을 수 없을지도 모를 그 기회를 조금이라도 오래 붙잡도록 의도적으로 반복한 것이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음악이 주로 성악 중심의 단순한 선율로 이루어진 것도 그 이유 중 하나다.
민속적인 노래를 떠올려도 좋다. 유럽의 마을 광장에서 불리던 춤곡이나 우리의 옛 동요도 대부분 반복 구조를 갖고 있다. 가락이 짧고 쉬운 만큼 같은 멜로디를 여러 번 이어 불렀고, 사람들은 그 단순한 반복 속에서 노래를 쉽게 외우고 함께 즐길 수 있었다. 당대 사람들에게 음악은 언제든지 틀어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이런 반복은 음악을 기억하게 하고 잠깐의 경험을 오래 남게 만드는 장치였던 셈이다. 그래서 반복은 개인에게는 음악을 기억하게 하는 수단이면서, 모두가 하나로 묶이는 공동체 경험을 만들어 주는 힘이기도 했다.반복은 또한 단순히 익숙함을 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청중은 이미 들은 선율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다음 소리를 예측하게 되고, 그 예측이 충족될 때 안도감을 느끼거나 예상과 달리 변형될 때 놀라움과 긴장을 경험한다. 이렇게 반복은 기억을 붙잡는 장치이자, 동시에 청중의 감정을 이끌고 음악 속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된다.
이 점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베토벤 교향곡 5번의 ‘운명’ 동기다. ‘다-다-다-단’, 단 네 음으로 이루어진 간단한 동기지만, 이 동기는 곡 전체를 관통하며 끊임없이 반복된다. 첫 번째 악장에서 단호하고 위압적으로 울릴 때 청중은 긴장과 불안을 느끼며 곡에 몰입하게 된다. 이어지는 악장에서는 그 긴장이 은근히 유지되며 숨죽이며 기다리는 듯한 미묘한 긴장감을 남긴다. 마침내 마지막 악장에서 해방감과 환희의 폭발이 찾아올 때에도 운명의 동기는 여전히 반복된다. 그 단순한 네 음은 청중의 마음을 벅차오르게 만든다. 반복 덕분에 우리는 단순히 멜로디를 기억하는 것을 넘어 긴장과 해소, 기대와 충족이라는 복합적인 감정의 흐름을 체험하며 음악 속에 더 깊게 몰입하게 된다.
클래식 음악이 ‘시간예술’이라 불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공간이 아닌, 시간 속에서만 완전히 경험되는 예술이다. 결국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시간 속을 걷는 경험이며 반복되는 선율을 따라가면서 우리는 음악이 전하는 기쁨과 슬픔, 긴장과 안도 같은 감정을 보다 선명하게 느끼게 된다. 그러니까 반복 없이는 클래식 음악도 없는 것이다.허명현 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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