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나쁠 때 법인세 낮춰 기업 지원’
역대 경제 수장들이 공유한 컨센서스
구 부총리는 법인세 인상 “적극 검토”
유리한 통계 숫자만 골라내 눈가림
이 장면에서 이질감을 느낀 건 법인세 인상 요구를 이렇게 흔쾌히 수용하는 경제부총리를 본 기억이 없어서다. 세수 부족을 이유로 법인세 인하에 반대한 이들은 여럿 있었다. 하지만 ‘경제 컨트롤타워’로 불리는 기재부, 그 전신인 재정경제부를 통틀어 법인세를 내려도 투자는 늘지 않는다고 단언하며 인상에 적극 찬성하는 부총리는 사반세기 동안 본 적이 없다.
2002년 김대중 정부는 28%였던 법인세 최고세율을 27%로 낮췄고, 노무현 정부도 2005년 25%로 인하했다. 이명박 정부는 2009년 22%로 3%포인트나 낮췄는데, 문재인 정부가 2018년 25%로 돌려놨다. 3%포인트 낮추려던 윤석열 정부는 야당 반대에 부딪혀 1%포인트 인하에 만족해야 했다. 이제 이재명 정부가 다시 25%로 높여 세제를 ‘정상화’ 하겠다고 한다.
과거 재정·세제를 책임지는 기재부, 재경부 수장들 사이에서는 경제가 어려울 때 법인세율을 낮춰 투자·고용을 촉진해야 한다는 컨센서스가 있었다. 다른 선진국들도 수십 년간 법인세 인하 경쟁을 벌여왔다. 김영삼·이명박·윤석열 등 우파 정부는 물론이고, 김대중·노무현 좌파 정부에서도 법인세율이 계속 낮아진 이유다.노무현 정부 첫해인 2003년 재경부 세제실장 출신 김진표 부총리가 법인세 인하를 주장했을 때 ‘청와대 386’의 반격은 거셌다. 하지만 대선 후보 시절 “법인세 인하는 큰 기업에만 유리하다”며 부정적이던 노 대통령은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로 한국의 국가신용등급 전망이 뚝 떨어지고, 주가까지 곤두박질치자 재경부 의견을 받아들여 세율을 낮췄다.
유일하게 세율을 높인 문 정부 때에도 우여곡절이 있었다. 문 정부 첫 경제수장인 김동연 부총리(현 경기지사)는 취임 초 “소득세, 법인세 등 명목세율 인상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한 달 뒤 추미애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증세를 건의하고, 문 대통령이 받아들이면서 약속을 못 지킨 경제수장이란 비판을 받았다. 올해 초 한 인터뷰에서 김 지사가 “(문 정부의) 첫 파열음은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에서, 두 번째는 갑작스러운 법인세 최고세율 인상에서 나왔다”고 한 걸 보면 말 못 한 속앓이가 깊었던 모양이다.
이번 구 부총리 발언이 더 불편한 건 그가 거론한 숫자 때문이다. 그는 62조5000억 원인 작년 법인세수와 103조6000억 원이 걷힌 2022년을 비교해 40% 감소했다고 했다. 2022년은 전년도 ‘팬데믹 특수’로 사상 최대 실적을 낸 삼성전자 등 대기업들이 법인세를 많이 낸 해이고, 반면 작년은 주요 기업이 실적 악화로 세금을 못 낸 해다. 앞서 세율 25%가 적용된 2018년 세수는 70조9000억 원, 2019년은 72조2000억 원이었다. 윤 정부가 세율을 24%로 낮춘 2023년에도 80조4000억 원이 걷혔다. 2022년이 이례적으로 세수가 많았고, 작년은 심하게 덜 걷힌 해일 뿐, 한국의 평년 법인세수는 70조∼80조 원 수준이란 의미다. 문 정부의 기재부 예산실장, 2차관을 거쳐 임기 말 국무총리실 국무조정실장을 지낸 ‘예산통’ 구 부총리가 이걸 모를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그런데도 세금 인상 논리를 뒷받침하기 유리한 숫자 2개만 콕 집어 비교한 건 전형적인 ‘통계 체리 피킹’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경제부총리의 발언에 대한 신뢰를 크게 떨어뜨리는 일이다. 게다가 세율을 1%포인트 다시 올려도 늘어나는 세수는 기껏해야 수조 원이다. 구 부총리 말대로 법인세를 깎아준다고 기업이 투자와 고용을 무조건 늘리진 않는다. 하지만 세율을 높이면 거의 틀림없이 기업의 투자와 고용, 배당은 위축될 것이다. 전 정부 정책의 흔적을 지우려고 관세 전쟁 중인 자국 기업에 세금을 더 물리는 ‘반(反)기업 정부’란 이미지는 덤이다.구 부총리는 노무현 정부 출범 초 파견돼 임기 5년을 청와대에서 함께해 공무원으론 특이하게 ‘순장조’로 불린 인물이다. “전 세계에서 기업 하는 사람이 활동무대를 어디로 할 것인가 결정할 때, 법인세율을 갖고 고려한다면 정부는 승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른 국가, 지역과 치열하게 경쟁하는 마당이면 1%라도 유리하게 해 줄 수밖에 없습니다.” 경제 관료의 설득에 법인세 인하로 마음을 돌린 노 대통령이 2003년 한 말이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구 부총리는 그와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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